[[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함평군 출신 인물]][[분류:1912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덕근}}}'''[br]'''金德根'''}}}}}} || ||<-2> [[파일:김덕근1.png|width=300]] || ||<|2> '''출생''' ||[[1912년]] [[9월 14일]] ||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 ||<|2> '''사망''' ||[[1980년]] [[3월 17일]] || ||[[서울특별시]] || || '''이명''' ||김원근(金元根)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덕근은 1912년 9월 14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신광학교를 졸업한 뒤 숙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이던 [[김철(독립운동가)|김철]]의 지시에 따라 1929년 1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1930년 한인소년동맹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31년 7월에는 상해 교민단에서 설립한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의 사교부장에 임명되어 한인 청년 당원 확보에 주력했다. 1932년 1월, 그는 화랑사(花郞社)를 창립했다. 화랑사는 신라의 [[화랑]]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교양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는 단장에 선출되어 단원들과 함께 임정요인의 연락업무 및 비서역할 등의 업무와 통신사무를 전담하였다. 또한 선무반원으로서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무 초모공작 활동을 전개하고 또한 임시정부와 불란서 영사관과의 연락책 및 통역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단행했다. 이후 일제의 검속이 강화되자, 그는 이규홍(李奎洪)과 함께 프랑스조계 거주의 한국인들에게 피난할 것을 알려줬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음날 [[안창호]], [[장현근]]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안창호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20대의 젊은 학생이기 때문에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나,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거주제한을 받고 살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조용히 지내다 1980년 3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덕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