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하동군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기범}}}'''[br]'''金淇範'''}}}}}} || ||<-2> [[파일:김기범.jpg|width=300]] || ||<|2> '''출생''' ||[[1885년]] [[9월 25일]]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 ||<|2> '''사망''' ||[[1951년]] [[7월 6일]] || ||[[부산광역시]] [[중구(부산)|중구]] 중앙동 || || '''묘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 백운공원묘지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기범은 1885년 9월 25일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종련(金鍾鍊)과 모친 정계언(鄭桂彦)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종련은 [[동학]] 신자로,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하동에서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관군에게 체포된 뒤 경상남도 감형에서 참수되고 그 목이 효수되었다. 이후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렵게 지내던 그는 1919년 4월 7일 청암면 평촌리에 거주하는 정신교(鄭信敎)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정재옥(鄭在玉) 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하였다. 그날 밤 태극기를 동네 김종을의 집 마당에 세운 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날 독립 만세를 부르는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군중이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1919년 4월 8일 오후 8시경 정재옥 등 50~60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기범이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김기범은 청암면장 화창조(化昌兆)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기를 강요하는 등 평촌리 광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김기범은 그 해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형 김기완(金淇完)과 함께 [[안희제]]가 운영하는 백산상회의 하동 지점인 남일상회를 설립하고 무역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진주로 이사했다가 다시 하동읍 북쪽 두곡리에서 살았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신했다가 1951년 7월 6일 부산 중구 중앙동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김기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 백운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