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ffde09 역임한 지위}}}'''||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법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 [include(틀:독립협회 지도부)]}}} || ||<-2> '''[[조선귀족|{{{#ffde09 대한제국 조선귀족 남작}}}]]''' || ||<-2> {{{#!wiki style="margin:-5px -10px; padding: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7054c, #29176e 20%, #29176e 80%, #07054c)" '''[[대한제국 중추원|{{{#ffde09 대한제국 제17대 중추원 의장}}}]][br]{{{+1 김가진}}}[br]金嘉鎭 | Kim Ga-ji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0804_478.jpg|width=100%]]}}} || ||<-2> {{{#ffd400 {{{-2 대한제국 대귀족 대례복 차림}}} }}} || || '''출생''' ||<(> [[1846년]] [[2월 24일]][* 음력 1월 29일.] || || '''사망''' ||<(> [[1922년]] [[7월 4일]] (향년 76세) || || '''본관''' ||<(> [[신 안동 김씨]][* 문충공 [[김상용|상용]](尙容)파 26세 진(鎭) 항렬.] || || '''자''' ||<(> 덕경(德卿) || || '''호''' ||<(> 동농(東農) || || '''학력''' ||<(> [[장원|정시문과]] {{{-2 ([[학사|급제]])}}}[* 장원급제로 입격하였다.] || ||<-2> '''{{{#ffde09 역임 지위}}}''' || || '''약력''' ||<(> 규장각검서관{{{-2 (奎章閣檢書官)}}}[br]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2 (涉通商事務衙門)}}}[br]내무부주사{{{-2 (內務府主事)}}}[br]홍문관수찬{{{-2 (弘文館修撰)}}}[br]총리교섭통상대신{{{-2 (總理交涉通商大臣)}}}[br]주진종사관{{{-2 (駐津從事官)}}}[br]일본공사관참찬관{{{-2 (日本公使館參贊官)}}}[br]주일판리대신{{{-2 (駐日辦理大臣)}}}[br]우부승지{{{-2 (右副承旨)}}}[br]교섭통상사무{{{-2 (協辦交涉通商事務)}}}[br]군국기무처회의원{{{-2 (軍國機務處會議員)}}}[br]외부협판{{{-2 (外部協辦)}}}[br]농상공부대신{{{-2 (農商工部大臣)}}}[br]황해도관찰사{{{-2 (黃海道觀察使)}}}[br]법부대신{{{-2 (法務大臣)}}}[br]중추원의장{{{-2 (中樞院議長)}}}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부모''' ||<(> 친부 김응균, 친모 [[박씨|함안 박씨]] || || '''형제자매''' ||<(> 양형 김화진, 친형 김영진 || || '''친인척''' ||<(> 고조부 김도순, 고조모 [[달성 서씨]][br]증조부 김세근, 증조모 [[성주 이씨]][br]친조부 김병성, 친조모 [[반남 박씨]] || || '''부인''' ||<(> 첫째부인 [[남양 홍씨]][br]둘째부인 [[임씨|부안 임씨]][br]셋째부인 [[경주 최씨]][br]넷째부인 [[전주 이씨]] || || '''자녀''' ||<(> 장남 김중한[br]차남 김정한[br]삼남 [[김의한]] || || '''손자''' ||<(> 첫째손자 김자동[br]둘째손자 김석동[br]셋째손자 김세동 || || '''증손''' ||<(> 첫째증손녀 김정원[br]둘째증손녀 김영원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_초상화.jpg|width=100%]]}}} || || {{{#ffde09 '''공식 초상화'''}}}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240db781a327aeb3d9d6fd875657339.jpg|width=100%]]}}} || || {{{#ffde09 '''김가진 조선귀족 남작의 사진'''}}} || [[조선]] 말기의 [[개화파]] [[문관|문신]], [[정치|정치가]], [[외교관]], [[독립유공자]], [[조선귀족]]. [[한국]] 최초의 [[외교관]]. 제17대 [[중추원|중추원 의장]].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 생애 == === 조선 외교관으로서 === >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br] >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br] >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br] > 그는 열렬한 개혁가였고 서구 문명을 극찬했다.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얘기로만 숱하게 들어 왔던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사소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왕명으로 가장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 >-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한국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 신복룡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 1846년 2월 24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 신교(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의 신 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아버지 김응균(金應均, 1801. 1. 6 ~ 1875. 4. 28)의 차남으로 [[https://sillok.history.go.kr/id/kzc_10310007_001|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노비의 수는 150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해방해주었다. 그는 문충공 [[김상용]]의 11대손으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 1853)가 첩이었던 탓에 [[서얼]]이었으므로 [[과거]] 응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1877년,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신설되자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강직한 반청자주의 신념을 가졌기에, [[리훙장]]의 기록에 따르 1884년,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한 면전에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41세 되던 1886년 (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6_014466|급제하여]]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이 되었으나, 같은 해 청나라 배격을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적발,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전라도]] [[남원시|남원도호부]]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톈진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이 개설되자 그를 눈여겨 본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특별한 낙점을 받아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행에 올랐다. 초대 공사 [[민영준]]이 국서만 일본에 전달한 뒤 그냥 귀국해버리자, 뒤이어 주일공사가 된 김가진은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 업무를 직접 처리하며 사실상 최초의 재외공관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일 [[청나라|청국]] 공사 리수창(黎庶昌)은 상국 공사에게 와서 부임신고를 하라는 뜻으로 김가진 외교관을 불렀다. 김가진 외교관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안 가고 버티다가 1년만에 청국 공사관을 방문했는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김가진 외교관은 4년간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을 통해 서양 산업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을 구해서 조선으로 보내고, 유학생들 뒷바라지에 애썼다. 울릉도에 불법으로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청국공사 왕펑짜오(王鳳藻)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하자, 김가진 외교관은 “조선은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욕하고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는가?”라며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1890년 10월,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김가진에게 수 년 전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이 걸린 일을 상기시키며,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때 김가진 외교관은 “조선은 요(堯) 임금 때부터 [[고조선|국가]]와 [[단군|임금]]이 있었다. 설혹 중국에 패하였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중국과의 사행(使行, 책봉과 조공을 위한 사신행차)은 실익(實益)은 조선이 챙기고 중국은 명분만 가져간다.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 하며 [[https://ajunews.com/view/20190123173454788?fbclid=IwAR0XTxka_0NY4PTsB3_-MDMU9LfnOZr9h6q4OgPFsWoJKeCNbajqKp86W90#_enliple|맞서기도 하였다.]] === 대한제국 대귀족으로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nCyf-r8zzOs)]}}} || || {{{#ffde09 '''동농 김가진 을사조약을 반대하다'''}}} || 1891년, 귀국해 안동대도호부사(정3품)를 역임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 개전의 시발점인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시 [[안경수]]와 함께 일본군에 협력하여, 경복궁 내에서 저항하던 조선군에게 저항을 중지하고 투항하라는 거짓 왕명을 전달했다. 이후 [[갑오개혁]]에도 참여했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 오늘날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내며 그의 호위무사 2백여 명을 동원해서 [[독립협회]] 창설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 개최에 참여했으며, 1900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으로 군림했으며, 1902년, 한글 학교를 설립하고 법부대신[*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 최종적으로 [[공작|정1품]]으로 오르는 위치에 도달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충청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고, 1907년, 규장각 대제학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noQyaEIwoo)]}}} || || {{{#ffde09 '''동농 김가진과 대동단의 잊혀진 전쟁, 두 번째 독립 운동'''}}} || 1910년, [[경술국치]] 시기에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10월 [[의친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몰래 망명시키려 준비했다가 중간에 발각되었고, 아예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때 나이가 이미 '''74세'''였는데, 신념을 떠나 육체적으로 이미 허약해지기 쉬운 시기임에도 거친 풍찬노숙의 길을 택한 것. 이후 임정과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조선 국왕과 대한 황제에게 충직했던 유신(遺臣)이었음에도 왕조 복벽(復辟)을 주장하지 않고 '''민국(民國)의 일원'''임을 자처했으며, 평생을 외교관으로서 살아 왔음에도 외교론보다는 '''무장 투쟁'''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의 유연성과 과감함이 빛난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260|#]] 1920년 3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1881)|박용만]]·[[나창헌]]·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국의 조선귀족 중엔 정말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는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이 아니어서 사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 사후 ===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가장]]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동원됐다. 김가진 귀족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석연치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김가진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작위를 반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일제는 직접 나와서 반납하라고 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바로 억류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제하고서라도 김가진 본인이 남작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쉽게 말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작위는 작위로 보지도 않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침투 등 공작활동에 용이하기 때문에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게 낫기도 하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자신은 작위 문제 등으로 서훈은 받지 못했으나,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을 서훈을 대신 주었으니 어느 정도 독립운동의 결실은 이룬 것.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김가진 조선귀족은 등재하지 않았다. 현대로 비유하면 [[국가정보원]] 블랙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듯이 상하이 임시정부 블랙 요원으로 활동했기에 대놓고 서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 터 표석이 설치되었으며 그의 뜻을 기리는 재단이 건립되었다. == [[김가진/가족관계|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김가진/가족관계)] == 독립문관련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VdfgkKxFMU)]}}} || || {{{#ffde09 '''동농 김가진 현판문을 적다'''}}} ||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독립문 편액 글씨는 이완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손자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96758.html|두]] [[http://news.joins.com/article/4466187|건의]] 주장을 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돈의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 · [[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창덕궁#s-4.4|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년 ~ 1922년)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년 ~ 1991년)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 >-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중앙SUNDAY 기사에서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씨가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교태전#s-4.4|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로써 그는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전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s-4.4|창덕궁 후원]]의 [[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창덕궁 부용정|부용정]], [[창덕궁 애련정|애련정]], [[창덕궁 희우정|희우정]], 금마문, [[창덕궁 폄우사|폄우사]], [[창덕궁 의두합#s-5|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그가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또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34&cid=51385&categoryId=51385|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 조선귀족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 >-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그러나 [[독립문|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그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갤러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jpg|width=18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jpg|width=173]]}}}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나름대로 잘 나가던 시절).jpg|width=1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관복).jpg|width=120]]}}} || || 대례복을 입은 모습[* 예술가, 장인들이 귀족과 황족들의 옷을 제작했고 당시 귀족, 황족들이 입던 의상이다.] || 백운장에서[* 서양식 프록코트로 한국 최초로 프록코트를 입었다.] || 관직 생활 때 모습 || 관복을 입은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E002456923_STD.jpg|width=18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jpg|width=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가진_초상화.jpg|width=18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E002465431_STD.jpg|width=160]]}}} || ||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때 || 노년의 모습 || 대례복 초상화 || 김가진[br]초상화 || == 둘러보기 == [include(틀:김홍집 내각)] [include(틀:조선귀족)] == 참고문헌 == * [[https://www.kci.go.kr/kciportal/mobile/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44106|제국 일본의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인식 - 조선 귀족에서 독립운동의 ‘거괴(巨魁)’로 ]] == 대중매체 ==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이낙훈]]이 연기했다. * 1998년 연극 <아!정정화>에서는 배우 이의일이 연기했다. * 대체역사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조선의 역사가 변하면서, 그가 가게 될 행보도 변화하게 된다. 조선애국당에서 고종이 속한 당 외의 당에서 선발된 첫 의원이 되었고 고종이 의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말에 네 네만 대답하면 의회가 왜 있냐고 분노하자 꿀먹은 벙어리가 된 다른 의원들과 달리 지금 조선이 주변국과 달리 강대국이 된건 모두 전쟁에서 승리하여서 일 뿐 조선이 뛰어난게 아니니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발전을 시켜야한다는 의견을 올린다. 차후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유사해질 듯. 거기다가 딸과 흥영군 [[이우]]가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간 것이 확실히 이우인지는 불분명하다(이우 밑으로도 [[의친왕]]의 아들이 많다. 공식적인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한 그는 의친왕과 친분이 있었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며느리 정정화는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과 친근한 사이였으며,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된 관계였다. 시누이 김영원이 한때 의친왕의 차남과 약혼했던 사이였는데,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사가 깨진 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회고하였으며, 그의 손자 김자동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은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가진(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을 참고. * 대체역사소설인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첩보조직의 수장으로 활약한다. 본인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서자로서의 설움 때문에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할 뻔하다가 적발되어 대원군의 수족이 되었던 끝에 그렇게 된 것이다. 대원군 아래의 사조직에 가깝던 공안서에서 활약하다가, 대원군 사후에 공안서가 그대로 정부기관이 되면서 관리까지 된 것. 공안서에서도 거물이다보니 [[블라디미르 레닌]]이 젊을 적에 만나보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개화당 지도자중 하나로 독립문 현판을 썼다. 2부부터는 개화당 중진이자 민의원 의장, [[칭제건원]] 당시에는 [[로마]]의 사례를 통해 조선이 명나라의 적통을 이었으니 황제를 칭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김성규(金星圭)와 함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며 실무형관료로 평가된다. 한참 등장없다가 2부 선거때부터 민의원의장으로 다시등장, 청나라를 당장 멸망시키자는 젊은 의원들을 진정시킨다. [[중화민국]] 설립 후 초대 주중공사가 된다. 3부에서는 황태자에게 서예와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총리가 아님에도 황태자곁에 앉으며 모든 의원들에게 존경받는 살아있는 의회정치의 화신임을 보여준다. [[분류:온건개화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김홍집 내각]][[분류:1846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후)]][[분류:조선귀족 남작]][[분류:서출]][[분류:독립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