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37호 ||<|2> ← || '''38호''' ||<|2> → || 39호 || || [[삼군부 총무당]] || '''금암기적비''' || [[약사사 삼층석탑]]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 || ||<-2> {{{#fff {{{+1 '''금암기적비'''}}}[br]{{{-1 黔巖紀蹟碑}}}}}}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금암기적비,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52-29 || || '''{{{#fff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fff 수량 / 면적}}}''' || 석비 1基, 토지 1㎡ || || '''{{{#fff 지정연도}}}''' || [[1978년]] [[12월 18일]] || || '''{{{#fff 소유자[br](소유단체)}}}''' || [[서울주택도시공사]]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서울주택도시공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금암기적비(전경).jpg|width=100%]]}}} || || {{{#fff ''' 금암기적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125&ccbaKdcd=21&ccbaAsno=0038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의 [[비석]].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받았다. == 상세 == 원래 이 자리에는 금암발참(黔巖撥站)이란 [[역참]]이 있었다. [[의주부|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중요한 역참 중 하나로 여겼던 곳이다. 1781년(정조 5년) 8월에 [[정조(조선)|정조]]가 증조할아버지 [[숙종(조선)|숙종]]의 능([[서오릉#s-2.3|서오릉의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영조]]의 옛 일화를 생각하면서 금암발참에 세운 비석이다. 비문 역시 정조가 직접 지었으며, 비문 건립과 동시에 그동안 거의 관리받지 못했던 금암발참을 새로 짓게 했다. 내용은 이렇다. [[경종(조선)|경종]] 재위 시절인 1721년(경종 1년)에 [[영조]]가 아직 연잉군일 때, [[숙종(조선)|숙종]]의 [[환갑]]을 맞아 명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다 금암역참에서 잠시 쉬었다. 편히 쉬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창릉천을 건너가는 소도둑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전해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연잉군은 참장을 불러 "흉년에다가 춥고 배고파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일 테니 봐주라"는 명을 내렸고, 다음 날 궁으로 갔더니 [[태제|왕세제]] 책봉을 받았다. 정조는 "영조가 숙종의 환갑을 기려 참배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그날에 후계자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이며, 영조가 재위 내내 선정을 베푼 징조가 이 일이었다."며 칭송했다. 즉, 어려운 백성의 상황을 생각한 영조의 따뜻한 마음--[[임오화변|네??]]--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 구조 == *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 비의 몸체)을 세우고, 상단에는 돌로 만든 팔작지붕을 올렸다. [각주] [[분류:조선군]][[분류:조선/건축]][[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조선의 금석문]][[분류: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