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르바초프 시대]][[분류:공산주의]][[분류:러시아어 단어]] [include(틀:냉전)] [include(틀:미하일 고르바초프)] [목차] == 개요 == [[영어]]: Glasnost/Perestroika. [[러시아어]]: Гласность(개방, 직역하면 공표 혹은 발표)/Перестройка(재건 혹은 재편성 이라는 뜻)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펼쳐진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으로, 결국 본인의 실각과 [[소련 해체]], [[냉전]]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 배경: [[공산주의]]의 약화 ==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s-2.2|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s-2.3|스탈린주의]], [[공산주의#s-2.4|마오주의]] 혹은 그 외의 어떠한 형태이든,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내재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점차 가속화되는 [[몰락]]의 중심에는 [[공산권]]의 핵심인 [[소련]]이 있었다. [[소련]]은 스탈린 시기 형성된 [[관료제]] 사회의 내재적인 계급모순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러한 중앙집권 관료제 속에서 소련은 빠르게 공업화를 이뤄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생산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기존의 중앙집권 관료제는 오히려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고 비효율과 낭비를 낳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방 국가들은 '''"비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공산주의]]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원동력은 [[청백리]]같은 [[노멘클라투라|고위 간부들]] 때문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론은 소위 '공산귀족', 즉 [[노멘클라투라]] 계급의 부상으로 철저히 논파되었다. 물론 당시의 [[관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서방]]의 [[68혁명]]의 여파로 [[헝가리 인민공화국|헝가리]][* 사실 1956년에 일어난 일이라 68혁명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이때의 [[너지 임레]]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지만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와는 다르게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검토 하는 등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기에 흐루쇼프가 위신실추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정권을 뒤엎게 된 것.],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참조],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 [[폴란드/역사]] [[레흐 바웬사]] 참조. 단, 폴란드는 [[1950년대]] 중반에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타 공산권 국가에 비하면) 온건파가 집권했었기는 했다. [[경제]]가 침체일로에 벗어나지 못했다는게 문제지.]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개혁 시도들은, [[동구권]]의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소련의 강경노선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로는 사실상 의미있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다. 더하여 이러한 강경노선은 [[동유럽]]의 공산정부가 가졌던 '''최소한의 지지와 [[정통성]]마저 상실'''하는 연쇄작용을 불러왔다.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만이 공산정권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경제 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식 [[공산주의]] 및 [[계획경제]]가 [[제3세계]]에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이 단기간에 '''가난한 농업국에서 [[세계]] 2위의 공업국[* 1위는 [[미국]].]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 참조]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련은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이 1%에서 2%를 웃돌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은 수출품의 38%가 [[천연가스]], 나머지는 [[중공업]], [[화학]] 제품이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181024202238/http://rus-stat.ru/stat/1931998_6.pdf|"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2018년 10월 24일 확인] 막대한 군비경쟁도 문제였다. [[OPEC]]의 [[오일 쇼크|석유 가격담합]]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시적으로 호황을 누린 소련[* 쉽게 간과할 수 있겠지만, 소련-[[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 생산국이다.]은, 마침내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영에 대항하여 [[석유]] [[생산]]을 급속히 늘리는 바람에 석유값이 급속하게 떨어지자 경기기 다시 후퇴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을 강요당했던 반면, 미국은 서서히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중앙계획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소련 및 일부 [[위성국]]들에서는 [[1980년대]] 초 일시적으로 경기 회복현상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1981년]]에서 [[1984년]]간 외채가 약 35~70%가량 하락], 근본적인 [[개혁]]이 실패한 이상 이러한 호조가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 p.41] 개혁에 실패한 관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고는 고작해야 [[영토]] 내에 묻혀 있는 천연자원들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해나갈 [[돈]]을 벌면서,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생활고와 역사적 민족감정이 맞물려 점증하는 '''자국 [[인민]]들의 불만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억제'''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 발단: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개혁]] == [[1985년]],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마침내 [[미하일 고르바초프|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개혁은 소련의 [[사회]] 전반에 폭풍우를 몰고 오게 되고, 이는 [[1991년]]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적인 해체와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진다. 고르바초프가 청년기를 보낸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의 집권기는, 강력한 통제와 억압으로 점철된 소련의 [[역사]] 속에서 잠시나마 [[해빙]]의 분위기가 사회를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에 더해 소련의 경직된 관료 사회를 몸소 겪었던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소련의 [[공산주의]]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모델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찌감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Glasnost)''' [[정보]]의 [[자유]]와 공개를 의미한다. 당시 소련에 만연해 있던, '''[[언론]] [[검열]] 및 어용화, [[사상]] 탄압 등 [[경찰국가주의]]'''에 대한 변혁을 의미한다. 흔히 ''''개방''''으로 번역된다. *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Perestroika)''' 정치·경제적 개조를 의미한다. '''부패한 [[관료제]] 타파''', '''[[공산주의]] 경제의 체제적 한계점을 개선'''하고 '''점진적인 시장자유화를 추구'''하는 등의 [[정책]]을 포함한다. 흔히 ''''개혁''''으로 [[번역]]된다. 대외적으로는 [[모스크바]]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공식적인 간섭권을 명기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는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정책지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고르바초프가 [[1987년]] [[11월 4일]], [[러시아 혁명]]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각국 사회주의 국가 사절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밝힌 것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의 수용을 거부하는 오만과 폐쇄성은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https://youtu.be/NwnYObGuscU?t=85|한국 보도 내용]]] 이어 경제 규모가 소련의 2배에 달하는 [[냉전|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각종 [[군비축소|군사용 무기 감축]]을 시도한다. === [[개혁]]의 [[실패]]와 [[동유럽]]의 붕괴 === [[냉전]]의 한 축을 이루는 [[소련]] 최상층부에서 쏟아져나온 혁신적인 [[정책]]들은 [[이념]]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엄청난 평지풍파를 몰고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진영]]과 [[제2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막연히 개혁·개방이 [[공산권]]을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게 하리라고 기대했을 뿐, 그 최종적인 결론, 즉 냉전의 종결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한계는 바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페레스트로이카, 즉 체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했으며,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즉 [[정보]]의 자유화가 여기에 필요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부패를 숨기고자 하는 관료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체제의 경직성이 맞물리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오히려 중앙권력의 추진력을 갈수록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 큰 문제는 열린 사고를 가진 개혁가들에게조차, ''''글라스노스트'가 '페레스트로이카'보다 훨씬 더 명확한 강령이었다'''는 점이다. 정보의 자유화나 [[민주]] 질서의 수립은 기본적으로 '통제'와 '허용'의 문제였지만, 오래 전부터 수렁에 빠져 있던 정치·경제적 지표들을 재건하는 일은 나아가야 할 방향조차도 뚜렷하지 않았다. 석유값이 [[석유파동]] 시기의 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라 소련의 주요 재정적 기반인 석유 [[수입]]은 늘어날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온 경제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시장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이미 내적 [[균형]]이 붕괴된 경제가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자본주의]]의 [[바다]] 속에 떠밀려갈 경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탈냉전]]과 [[소련 해체]] 이후 그 결과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보리스 옐친]] 정부 하에서 극심한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확대, 복지체계 붕괴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몇 개 [[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수십년간 공산당의 강력한 탄압에 억눌려 있던 연방의,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가 뒷받침되지 못한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혼돈의 카오스|사회적 혼돈]]'''으로 이어졌다. [[동유럽]]의 지도자들은 곧 정권의 힘만으로는 끝없이 불어나는 [[대중]]의 [[힘]]을 통제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련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일찌감치 폐기함으로서 이미 [[위성국]]의 공산당에 대한 보호를 사실상 철회한 상태였다.~~하긴 제 코가 석자인데~~ [[동유럽 혁명|결국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격변기를 거쳐 민주정부로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런데 [[선거]]가 허용되자마자 옛 공산당의 후신 정당이 다시 [[여당]]으로 당선된 케이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원래도 일단은 [[민주주의]]긴 했으니 뭐… [[인민민주주의]]~~] === [[소비에트 연방]]에 미친 영향 === [[소비에트 연방]]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던 사회주의 공화국들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던 일부 개혁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던 반면, 예상외로 '''대다수의 소련 [[인민]]들에게는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자신의 경험도 그의 행보에 영향을 주었다. 혁명 [[영웅]]이던 [[블라디미르 레닌|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무학(無學) [[광부]]로 출세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공산당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제철소]] 기사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와는 달리, 고르바초프는 농민 가정 출신이기는 해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 계층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기존의 서기장들과는 달리 [[서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급진적인 개혁안만을 내놓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급격한 체제 변화에 대한 혼란'''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20~[[30년대]] 사이 나름대로 짧은 시기로나마 비공산주의 국가였었던 [[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ㆍ[[불가리아]]ㆍ[[루마니아]] 등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한때 공산권에 속해 있었던 중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나치 독일군]]에게 두들겨 맞아 점령당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정치 권력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중 밀고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원치 않게 공산주의 정치를 강요당한 점도 존재한다.], 대다수의 소련인들[* [[독소 불가침조약]]과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확장된 일부 영토는 제외.]은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멸망 이후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소련]]으로 이어지는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 말기에는 초고령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났던 사람들이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서기장 자신도 [[소련인]]으로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서기장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던 [[1985년]]을 기준으로 40세 이상의 모든 [[폴란드인]]들이 비(非) 공산주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가 공산체제 하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1956년]], [[1970년]]) [[정권]]을 뒤엎은 경험까지 가졌던 반면에 68세 이하의 모든 본토 출신 소련인들은 공산주의 외의 [[사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당대 소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혁명]]이란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대다수 소련인들이 정권과 정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구권]] 사회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개인주의|개개인의 삶의 질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들은 유가 폭등으로 막대한 [[흑자]]를 벌어들인 [[70년대]] 말을 즈음하여 국민적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던 기억을 잊지 못했고, 당시의 [[정치적 무관심|실질적인 국가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고, 설령 알 수 있더라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일반 대중에게 지지받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혁신적인 삶의 질 향상이 뒤따라야 했으나, 이미 석유값이 고점에 비해 절반에 못 미치던 상황에서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불가능]]'''한 일이었다. == 절정: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 [[자본주의]]화는 이미 경쟁력 없는 소련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생필품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국영기업들의 경영을 자율화시켰지만 막상 국영기업들은 경영자율화를 기회삼아 생산되는 상품의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몇배의 [[가격]]으로 [[시장(경제)|시장]]에다가 [[독과점|비싸게 팔아치우기 시작하면서]] 국영상점에 납품되는 물건 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소비자들은 더 긴 줄을 서야했고, 결국 소련 당국에서 돈을 더 찍어내야 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물가가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고르바초프 시절의 임금상승률은 총 50%를 기록하며 구매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막상 이 구매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품생산량으로 인해 암시장의 팽창과 물자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서구 소비재들의 수입이 늘어났지만 이는 무역 역조 현상을 심화시켰다. 마침 허용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그동안 억눌렸던 대중적인 분노에만 불을 붙였다. 국제적으로도 소련의 영향력은 동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고, 마침내 [[1990년]] [[동독]]이 [[서독]]에 [[독일 재통일|흡수 통일]]되기까지 이른다.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지에서 [[폭동]]과 [[민란]]이 일어났고, 지방 행정단체의 수장들은 권력을 이용해 무너져가는 경제 속에서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결과론적으로 볼 때 고르바초프는 급증하는 혼돈 속에서 그 자신이 닻을 올렸던 "민주적 공산주의"를 성공적으로 완주시키기에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1991년]] 초까지도 ([[발트 3국]]과 [[몰도바]], [[조지아]], [[아르메니아]]을 제외한) 9개 공화국은 연방 해체에 반대했다. 이들은 '''각 공화국들이 동등한 [[주권]]을 인정받는 연합체로서''' [[주권국가연맹|소련의 존속]]에 찬성했다. [[1991년]] [[3월]]의 [[국민투표]]에서 고르바초프는 76%의 지지를 얻어 '''소련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8월 쿠데타|예상치 못한 복고적 쿠데타]]가, 조금씩 안정화되어 가던 소련에 [[보리스 옐친|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가하게 된다. == 여담 == || [youtube(KoxC5fubzBc)] || [youtube(RD_XUuNHPCI)] || || [[데데테]], "뱀 페트로프"(Змеи Петров, 1991) || 알리사(АлисА), "새로운 방식"(Новый метод, 1989) ||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담긴 노래들. 당시 러시아 민중이 페레스토로이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볼 수 있다.[* 물론 저 밴드들은 언더그라운드에 가까운 밴드들이었다. 원칙적으로 소련 시절 음악으로 밥먹고 살려면 보컬-기악 앙상블(ВИА)이라는 이름의 관영 밴드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수많은 페레스트로이카 찬양곡을 양산해냈다. 아이러니한 건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소련에서 탄압의 대상이었으나 이런 탄압을 유하게 풀어준 것이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언더 음악가들은 언론과 당국의 다굴, 강제 수색 및 압수, 강제 해체, 심지어는 정신병원 강제입원에 입대(!)까지 별의별 탄압에 시달렸다. 예시로 언급된 데데테의 리더 유리 셰프추크 또한 언론을 동원한 KGB의 집중포화와 압수수색에 못 버티고 고향인 우파에서 레닌그라드로 도망치는 등 탄압의 희생자 중 하나였다.][* 알리사와 데데테는 1980년대 결성되어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지만, 재미있게도 두 밴드의 성향은 이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2023년 현재 알리사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성전"이라 부르는 등 옹호하고 있고, 데데테는 리더가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법 당국에 고발당하고 이후 모든 공연이 취소되는 등 불이익을 겪고 있다.] [[의도는 좋았다|취지는 좋았지만,]] 결국 개혁개방 정책 실시 당시에도 실제 효과는 미비했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제멋대로 왜곡해서 갖다붙이던 소련의 현실을 비꼰 유머가 나돌았다. [[공산주의 유머/소련/정치와 행정]] 항목에도 있는 내용이다. [[파일:310316308_10224632272688833_8128112618797391628_n.jpg|width=500]] 1990년에 방영 된 [[꼬마펭귄 핑구]]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를 풍자한 표지판이 나온다.[* [[핑구]]와 여자친구인 핑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이 표지판 앞에서 헤어지며 씁쓸해지는 장면이다.]([[https://youtu.be/9gjlR6TKebA?si=UFWOQwOMCImWAlcW&t=289|4:49 부터]]) >1980년대 말 소련의 한 식당에서. > >문) "왜 [[미트볼]]이 [[정육면체]] 모양이죠?" >답)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개조)!"''' > >문) "게다가 덜 익었잖아요!" >답) '''"우스코레니예(ускоре́ние, 가속)!"''' > >문) "심지어 한 입씩 누가 베어먹기까지 했네!" >답) '''"고스프리욤카(Госприёмка, 품질 검사)!"''' > >문) "뭘 잘했다고 묻는 말마다 그렇게 뻔뻔스럽게 되받아치는 거죠?" >답)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언론의 자유)!"''' 당시 혜화[[대학로(서울)|대학로]]에 글라스노스트라는 이름의 호프집이 생길 정도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 출처 ==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에릭 홉스봄 저, 이용우 역, 까치출판사 나머지 주요 자료들에 대해서는 본문 중에 각주로 표기함. == 둘러보기 == [include(틀:소련 관련 문서)] [include(틀:공산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