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고슬라비아 왕국 페타르 2세의 왕비[br]{{{+1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br]Πριγκίπισσα Αλεξάνδρ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jpg|width=100%]]}}} || || '''이름'''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br](Αλεξάνδρ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출생''' ||[[1921년]] [[3월 25일]][br][[그리스]] [[아테네]]|| || '''사망''' ||[[1993년]] [[1월 30일]] (향년 71세)[br][[영국]] [[잉글랜드]] 웨스트서식스 버제스 힐|| || '''배우자''' ||[[페타르 2세]] ,,(1944년 결혼 / 1970년 사망),,|| || '''자녀''' ||알렉산다르|| || '''아버지'''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 || '''어머니''' ||아스파시아 마노스|| || '''종교''' ||[[그리스 정교회]]||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 왕국|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이자 [[페타르 2세]]의 아내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왕비다.[* 단, 망명정부 시절에 결혼했다가 1년 만에 왕정이 폐지되어 왕비 역할을 한 것은 사실상 없으며, 유고슬라비아에 방문한 적도 없다.] == 생애 == === 어린 시절 === 1921년 3월 25일, 5개월 전 [[원숭이]]에게 물려 [[패혈증]]으로 사망한 [[그리스 왕국]]의 국왕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의 [[유복자|유복녀]]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당시 그리스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라의 어머니인 아스파시아 마노스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적법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고, 결국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하게 되었다. 아스파시아 마노스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왕위 계승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겠지만 다행히 딸 알렉산드라가 태어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lejandra_de_Grecia_con_su_abuela_Sofía_de_Prusia.jpg|width=100%]]}}} || || 친할머니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소피아 왕비]]가 안고있는 알렉산드라 || 하지만 알렉산드라와 어머니 아스파시아 마노스는 왕족으로써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던 1922년, 할머니인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소피아 왕비]]의 주도로 법이 바뀌면서 알렉산드라는 공식적으로 [[그리스 왕국|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왕위 계승권은 얻을 수 없었으며[* 당시 그리스 왕국은 살리카법을 따졌기에, 부모님의 결혼과 상관없이 계승권이 없는건 마찬가지다.] 왕실에서 알렉산드라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 망명 === 1922년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패배로 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퇴위하였고 큰아버지인 [[요르요스 2세]]가 즉위했다. 하지만 1924년 [[그리스 제2공화국]]이 생기면서 요르요스 2세마저 퇴위했고, 모든 왕족들은 [[그리스]]를 떠나 망명해야 했다. 아스파시아 마노스는 시어머니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소피아 왕대비]]와 어린 딸과 함께 [[피렌체]]로 망명길에 올랐다. 피렌체에서 알렉산드라는 고모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루마니아의 엘레나 왕세자비]]와 이리니 공주, 에카테리니 공주 및 오촌 당숙 [[필립 마운트배튼|필리포스 왕자]][* 촌수로는 오촌이지만, 필리포스가 늦둥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였다. 생일은 알렉산드라가 석달정도 빠르다.], 고종사촌 [[미하이 1세|미하이 왕자]]와 나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7년, 알렉산드라와 아스파시아 마노스는 [[영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7살이 된 알렉산드라는 당시 여느 상류층 아이들처럼 기숙 학교에 보내졌으나 어머니와 떨어진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 했다고 한다. 결국 [[결핵]]에 걸려 기숙학교를 그만두었고 어머니와 함께 [[파리(프랑스)|파리]]에 살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최종적으로 알렉산드라는 [[베네치아]]에 망명하게 되었다. 1935년에 큰아버지 [[요르요스 2세]]가 복위되면서 다시 그리스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당시 국민들이 왕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거주하면서 그리스를 왕래했다. 11년만에 그리스 땅을 밟은 알렉산드라는 작은아버지 [[파블로스 1세|파블로스 왕자]]와 [[프리데리케 루이제|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주]]의 결혼식과 같은 여러 왕실 행사에 참석했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란 알렉산드라에게는 혼담이 들어오게 된다. 상대는 [[알바니아 왕국]]의 [[조구 1세]][* 무려 26살(...)이나 연상이다.]였는데, 당시 알바니아와 그리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조구 1세는 헝가리 귀족과 결혼했다. === [[제2차 세계대전]] === [[제2차 세계대전]] 도중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알렉산드라와 아스파시아 마노스는 [[베네치아]]를 떠나 [[아테네]]로 돌아갔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라는 간호사로 일하며 다친 군인들을 도왔다. 그러나 [[그리스 침공|나치가 그리스에 쳐들어오면서]] 그리스 왕족들은 또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집트]]와 [[남아프리카]]로 뿔뿔이 흩어졌다. 알렉산드라와 아스파시아 마노스는 [[요르요스 2세]]와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영국에서 [[적십자]] 활동을 했으며 영국에 머물고 있던 그리스 왕족들인 오촌 당고모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와 당숙 [[필립 마운트배튼]]과 교류하며 지냈다.[* 당시 필립과 알렉산드라 공주가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 결혼 === 1942년, 알렉산드라는 장교들의 행사에서 팔촌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페타르 2세]]를 만났고[* 알렉산드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증손녀고, 페타르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어니스트 앨버트|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의 증손자다.], 곧 사랑에 빠져 결혼을 고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해체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페타르 2세의 어머니 마리야 왕대비[*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에든버러의 마리]]의 차녀다.]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페타르 2세와 알렉산드라는 2년 동안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집에서 만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eter-Alexandra-RFoS.jpg|width=100%]]}}} || || 결혼 사진[* 왼쪽부터 [[조지 6세]], [[페타르 2세]], 알렉산드라, [[요르요스 2세]]] || 1944년 3월 20일, [[페타르 2세]]와 알렉산드라가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페타르 2세가 여전히 망명중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런던]]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서 열렸으며, [[조지 6세]], [[호콘 7세]], [[빌헬미나 여왕]] 등이 참석했지만 페타르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야 왕대비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 왕비 === 알렉산드라는 [[페타르 2세]]와 결혼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상황은 아주 좋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는 대부분 [[추축국]]에 합병되었고 [[마케도니아 독립국]]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괴뢰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알렉산드라는 장남 알렉산다르 왕세자를 출산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런던]]에서 태어난 알렉산다르 왕세자에게 [[유고슬라비아]] 국적을 주기 위해 태어난 곳을 임시로 유고슬라비아 영토로 바꾸는 법령을 발표했다고 한다.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2세|엘리자베스 공주]]가 대부모가 되어주었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1d9baa7616cd6b36e2a78203c80df68.jpg|width=100%]]}}}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Kraljica-Aleksandra-4.jpg|width=100%]]}}} || ||<-2> 남편 [[페타르 2세]], 아들 알렉산다르 왕세자와 함께 || 하지만 왕세자가 태어난 기쁨도 잠시, 1945년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더이상 유고슬라비아에 입국할 수조차 없게 된다. === 망명 생활과 가난 === [[영국]] 정부에게도 버림받은 [[페타르 2세]]와 알렉산드라는 유럽을 떠돌면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그들은 유럽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했고 알렉산드라의 보석을 팔면서 목숨을 연명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돈은 모두 떨어져 버렸고, 남편 페타르 2세마저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술에 찌들어 살았다. 페타르 2세에 대한 배신감과 [[거식증]]으로 고통받던 알렉산드라는 자살 시도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페타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됐다. 아들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했으며 결국 4살 때 [[이탈리아]]에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알렉산다르는 외할머니 아스파시아 마노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긴 했지만 페타르 2세와 알렉산드라는 아들을 거의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52년에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알렉산드라는 또 다시 자살시도를 했다.[* 이 때 작은어머니 [[프리데리케 루이제|프레데리키 왕비]]의 전화로 간신히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우울증에 지친 [[페타르 2세]]는 알렉산드라와 이혼 절차를 밟기도 했으나 [[그리스 왕국]]의 [[파블로스]]와 [[프리데리케 루이제|프레데리키 왕비]]의 중재로 철회하게 된다. 이후 [[페타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관계는 잠시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고, 알렉산드라는 자서전을 출판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시, 두 사람의 사이는 다시 악화되어 페타르 2세는 [[미국]]에서, 알렉산드라는 [[베네치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베네치아에서 또 자살시도를 했지만 이번에는 아들 알렉산다르 왕세자에 의해 목숨을 건졌고 동서 [[바덴]]의 마르가리타[* [[페타르 2세]]의 남동생 토미슬라브 왕자의 아내(후일 이혼).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와 [[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의 장녀로, 알렉산드라에게는 육촌이기도 하다.]의 보살핌을 받았다. === 말년 === 1970년 11월 3일, [[간경변]]을 앓고 있던 남편 [[페타르 2세]]가 [[미국]] [[덴버]]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미국 [[일리노이]]에 안장되었으며 알렉산드라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2년 뒤에는 아들 알렉산다르 왕세자가 오를레앙브라간사의 마리아 다 글로리아 공녀[* [[브라질 제국|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브라질)|페드루 2세]]의 딸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이자베우 황태녀]]의 맏아들인 페드루 지 아우칸타라의 손녀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이종사촌이기도 하다.]와 결혼했지만[* 1985년에 이혼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그녀는 아들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1972년에는 어머니 아스파시아 마노스가 사망하여 이제 정말 혼자가 된 알렉산드라는 [[베네치아]]의 집을 매각하고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3년 1월 30일에 암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런던]]에서 치러졌으며 아들 알렉산다르 왕세자와 세 손자들, 그리고 사촌동생 [[콘스탄티노스 2세]]와 그의 아내 [[아네마리 다우마 잉리드|아나마리아 왕비]]가 참석했다. 유해는 그리스로 옮겨져 타토이 왕실 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혔다가, 2013년에 [[세르비아]]로 이장되어 역시 미국에서 이장된 [[페타르 2세|남편]]과 함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br]{{{-2 (Alexandra of Greece and Denmark)}}} ||<|6>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br]{{{-2 (Alexander)}}} ||<|3> [[콘스탄티노스 1세]][br]{{{-2 (Constantine I)}}} || || [[요르요스 1세]][br]{{{-2 (George I)}}} || ||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니콜라이 1세]]의 손녀다.][br]{{{-2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 ||<|3>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프로이센의 조피 공주]][br]{{{-2 (Princess Sophia of Prussia)}}} || ||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br]{{{-2 (Frederick III)}}} || ||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다.][br]{{{-2 (Victoria, Princess Royal)}}} || ||<|7> 아스파시아 마노스[br]{{{-2 (Aspasia Manos)}}} || ||<|3> 페트로스 마노스 대령[br]{{{-2 (Colonel Petros Manos)}}} || || 트라시불로스 마노스[br]{{{-2 (Thrasyvoulos Manos)}}} || || 록사니 마브로미칼리스[br]{{{-2 (Roxane Mavromichalis)}}} || ||<|3> 마리아 아기로풀로스[br]{{{-2 (Maria Argyropoulos)}}} || || 이아코보스 아기로풀로스[br]{{{-2 (Iacobos Argyropoulos)}}} || || 아스파시아 아나기로스 페트라키스[br]{{{-2 (Aspasia Anargyros Petrakis)}}}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2> '''1남''' ||<|2>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의 왕세자 알렉산다르[br]{{{-2 (Alexander, Crown Prince of Yugoslavia)}}} ||<|2> [[1945년]] [[7월 17일]] || --오를레앙브라간사의 마리아 다 글로리아 공녀--[br]슬하 3남 || ||<#F0F8FF> 카테리나 바티 || == 여담 == * [[루마니아 왕국]]의 [[미하이 1세]]와 고종사촌이고, [[스페인]]의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소피아 왕대비]]와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친사촌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은 촌수로는 오촌 당숙이지만 알렉산드라의 할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1세]]와 필립의 아버지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의 나이차이가 14살이나 나는데다 필립도 늦둥이로 태어나서 둘이 동갑이었다. * [[Hearts of Iron 4]]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카라조르제비치 루트로 가면 왕실 결혼상대로 등장한다. 유고슬라비아가 알렉산드린을 선택할 경우 연합국에 가입할 수 있다. [[분류:1921년 출생]][[분류:1993년 사망]][[분류:그리스의 공주]][[분류:덴마크의 공주]][[분류:유고슬라비아 왕비]][[분류:글뤽스부르크 가문(그리스)]][[분류:카라조르제비치 가문]][[분류:아테네 출신 인물]][[분류:암으로 죽은 인물]][[분류:오플렌추 교회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