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튀르키예의 행정구역)] [[분류:튀르키예의 행정구역]] [[파일:터키 귀뮈샤네.jpg|width=880]] 시가지 전경 ||[[파일:터키 헤기오스 그레기오스.jpg|width=404]]||[[파일:귀뮈쉬하네 터키 12.jpg|width=434]]|| || 헤기오스 그레기오스 성당 유적 || 산타 하라벨레리 유적 || [[파일:사탈라 터키 2.jpg|width=880]] 동남쪽 40km 지점의 사탈라 유적 [목차] == 개요 == {{{+1 Gümüşhane }}} [[튀르키예]] 동북부의 도시. 귀뮈샤네로 표기된 글들도 보이지만 이 단어는 [[은]]을 뜻하는 gümüş와 집을 뜻하는 hane의 합성어이므로 gümüş/hane로 띄어서 발음되므로 잘못된 표기이다. [[트라브존]]에서 서남쪽으로 50km, [[에르진잔]]에서 북쪽으로 60km, [[바이부르트]]에서 서북쪽으로 55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는 4만명으로, 귀뮈쉬하네 도의 주도이다. 지명은 터키어로 [[은]]을 뜻하는 귀뮈쉬와 장소를 뜻하는 하네의 합성어로, 그리스식으로는 아르기로폴리스 (Αργυρόπολις, 그리스어로 '은의 도시')라 불렸다. 이름에 걸맞게 [[오스만 제국]]기 아나톨리아의 대표적인 탄광 도시로 번영하였고, 한때 현재보다 많은 6만 인구가 거주하였으나 다른 광산이 개발되고 그리스 인들이 [[러시아 제국]] 등지로 이주하며 쇠퇴하였다. 과거에는 [[흑해 그리스인]]과 [[라즈인]] (찬인) 등이 공존했으나 근대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고, 현재는 튀르크계 주민이 주류를 차지하고 소수의 [[쿠르드]] 인이 거주한다. 도안켄트 강을 따라 형성된 시가지에는 도시 박물관이 있고, 동남쪽 외곽에는 귀뮈쉬하네 대학교가 있다. 인근 지역에는 각종 유적이 많다. 동북쪽 30km 지점에는 그리스 인들이 살던 산타 하라벨레리 유적이, 동남쪽 40km 지점의 사다크에는 로마 군단 기지였던 사탈라 유적이 있다. 해발 115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여름에도 34도를 잘 넘지 않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페스틸(pestil)이라고 불리는 건과일 제품이 특산품이다. [[오디]]의 즙을 졸인 것을 종잇장처럼 얇게 펴고 햇볕에 말린것인데 사이에 헤이즐넛이나 호두가루를 넣고 김밥처럼 돌돌만것을 썰어서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 역사 == ||[[파일:터키 사탈라 1.jpg|width=300]]||[[파일:터키 사탈라 2.jpg|width=572]]|| || '사탈라의 [[아프로디테]]' || 사탈라 출토 유물 || 서쪽 6km 지점에 고대 도시 티아 (Θεία)가 있었고, 동남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는 서기 117년부터 [[로마 제국]]의 제15 아폴로나리스 군단이 주둔한 사탈라 (그리스어: Σάταλα / 아르메니아어 : Սատաղ가 있었다. 298년과 530년 로마군과 [[사산 제국]]군이 이곳에서 충돌한 [[사탈라 전투]]가 있었고, 두 전투 모두 로마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다만 607년경 결국 사산 제국에 점령된 후 도시는 쇠퇴하였고, 13세기경 사라졌다가 1870년대에 발굴되었다. 당시 발굴되어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기원전 2세기 경의 '사탈라 아프로디테' 청동상은 아르메니아의 여신 아나히트를 묘사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따라서 1995 ~ 2005년까지 아르메니아 5천 드람 지폐에 새겨졌다] === 은광 도시 === [[파일:귀뮈샤네 터키.jpg]] 1910년대 귀뮈쉬하네 풍경 7세기 이후 사탈라는 쇠퇴하여 사라졌고, [[동로마 제국]] 시기 현 도시 서쪽에 '찬 ([[라즈인]])의 땅'이란 의미인 차니카 (Τζάνιχα)라는 마을이 들어섰다. 이후 [[트레비존드 제국]]을 거쳐 일대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비단]] 생산을 위해 뽕나무를 재배했다가 15세기 후반부터 37개의 은광이 개발되며 터키어로 은이라는 뜻인 귀뮈쉬라 불렸다. 16세기 말엽 술탄 [[무라트 3세]]는 현지 은광에 대한 특권을 부여하였고, 이후 각지에서 [[흑해 그리스인]] 광부들과 사업가들이 몰려들며 인구가 6만으로 늘어나고 자체 동전을 주조할 정도로 번영하였다. 그 결과 1650년 주교구가 대주교구로 격상될 정도로 도시가 확장되었고, 프론티스티리온 학교 (19세기에는 여학교도 개설)가 세워지는 등 교육 도시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다만 18세기 들어 타지역에서 새로운 광산이 발견되자 그곳으로 인구가 유출되며 쇠퇴하였다. 한편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본격화되고 [[그리스 독립 전쟁]]이 터지자 그 영향으로 현지 그리스 인들은 튀르키예식 귀뮈쉬하네 대신 이를 그리스어로 훈차한 아르기로폴리스라 고쳐 불렀고, 1829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일대에 진주한 [[러시아 제국]]군을 환영 혹은 협조하였다. 이후 [[아드리아노폴리스 조약]]으로 러시아 군이 철수하자 튀르크 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그리스계 주민 다수가 러시아 군을 따라 조지아 등지로 이주하였다. [[1차 대전]]기인 1916년 7월 러시아 군이 재차 점령했으나 [[러시아 혁명]] 후 1918년 2월에 철수하였다. 남은 기독교도들은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시에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 갤러리 == [[파일:터키 카라자.jpg|width=910]] 서북쪽 10km 지점의 카라자 동굴 === 산타 하라벨레리 유적 === [[파일:귀뮈쉬하네 터키 2.jpg|width=910]] [[파일:터키 귀뮈쉬하네 2.jpg|width=910]] [[파일:터키 귀뮈쉬하네 1.jpg|width=910]] [[파일:터키 산타.jpg|width=910]] [[파일:산타 터키.jpg|width=910]] [[파일:산타 터키 1.jpg|width=910]] [[파일:타쉬 다리 터키.jpg|width=910]] === 사다크 (사탈라 유적) === [[파일:터키 사탈라.jpg|width=910]] ||[[파일:터키 사탈라 3.jpg|width=310]]||[[파일:터키 사탈라 4.jpg|width=565]]|| [[파일:사탈라 터키 3.jpg|width=910]] [[파일:사탈라 터키 1.jpg|width=635]] [[파일:사탈라 터키.jpg]] 사탈라 유적 [[분류:튀르키예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