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목차] == 개요 == [[고려]]의 인물. 자는 회지(晦之), 시호는 문청(文淸). == 생애 == [[무신정권]] 시기 권단은 속세에 운둔하려는 뜻을 두고 관직에 나가기를 꺼렸다. 그러나 무신 집권자의 측근이었던 아버지 [[권위(고려)|권위]]가 가산을 들여 문하녹사 자리를 얻었고, 권단은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갔다. 재상이었던 [[류경]]은 권단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으므로 [[아전|서리]]가 되지 말고 과거를 보라고 권유했다. 권단은 과거에 급제했고 합문지후, [[영덕군|예주]](禮州)·[[순천시|승주]](昇州)·[[맹산군|맹주]](孟州)·[[개천시|개주]](价州) 부사를 역임했다. [[원종(고려)|원종]] 재위기에 전라도안찰사를 지냈다. 원종이 [[원나라]]에 갔다가 1270년 5월 상장군 정자여, 대장군 이분희를 먼저 귀국시켜 개경으로 환도하는 조건으로 종전하겠다는 [[쿠빌라이 칸]]의 뜻을 전했다. 집권자 [[임유무]]는 반발하며 야별초를 보내 왕의 행렬을 막아서고 백성들을 섬으로 보내 항전을 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라도안찰사 권단은 왕명에 따라 전라도의 백성들이 섬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충청도안찰사 최유엄과 서해도안찰사 변량도 임유무 정권의 명령을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삼별초]] 반군이 전라도 [[제주도]]에 침입하자 안찰사 권단은 영암부사 김수에게 관군 200명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게 하고 장군 고여림에게 관군 70명과 함께 김수를 돕게 했다. 그러나 김수와 고여림은 전사했고 관군은 전멸해 결국 반군에게 제주를 빼앗겼다. 동경유수를 지내며 공납으로 바치던 비단을 유수가 사적으로 거두던 것을 철폐했고, 3년치 공납을 올려보냈다. 조세를 떼어먹던 어느 경주 사호(司戶)의 골([[腦]])을 '''부숴버리기도'''([[碎]]) 했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서워 다리가 떨렸다. 이후 [[충렬왕]] 재위 초반, 권단이 개경으로 돌아가 전리총랑을 맡다가 권단이 살던 동네에서 불이 났는데, 권단의 집만 멀쩡했던 것을 두고 사람들은 '백성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충렬왕 때 국자좨주 좌사의대부를 지내다가 1279년 6월 파직됐다. 권단이 경상도안렴사로 있을 때 [[어의]]에 사용하는 비단의 값을 높게 책정해 일부를 사적으로 거두거나, 고을 사람을 보내 자기 땅을 경작하게 한 부사들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권단이 비단값을 깎아 품질이 전보다 떨어졌고, 공납품에 이상이 있어 진상을 조사하니 읍리들은 모두 권단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재상이 권단의 백성을 위한 행동을 변호했고, 권단은 곧바로 다시 복직했다. 같은 해 9월 충청도 도지휘사로 임명돼 전함을 건조했다. 권단은 1287년 좌부승지를 거쳐 밀직학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뜻이 확고해서 곧 지첨의부사로 은퇴했고, 곧 [[찬성사]] 관직이 더해졌다. 1304년 중국의 승려 소경이 고려에 왔는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권단은 출가해서 그를 스승으로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유학자인 아들 [[권부]]가 뜯어말릴 것을 걱정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권부가 없을 때 개경 선흥사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권부가 통곡하자 "내 수염과 머리카락을 다시 붙이려느냐? 이것이 내가 본래 품었던 뜻이다."[* 將復鬚髮我耶? 此予素志也.]라고 말했다. 1312년 1월 9일[* 음력으로는 1311년 12월 19일.] [[가부좌]]를 한 채로 죽었다. 손자 [[권준(고려)|권준]]이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뒤에 문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가족관계 == * 처: 변한국대부인 노씨 * 아들: [[권부]] 간의대부 노연(盧演)의 딸과 결혼해 아들 권부를 뒀다. [[분류:고려의 인물]][[분류:안동 권씨]][[분류:131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