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고려국 국대비'''}}}[br]{{{+1 '''국대비 왕씨'''}}} || || '''존호'''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br](慈睿貞明翼聖思齊惠德三韓國大妃) || || '''작위''' ||복녕궁주(福寧宮主) || || '''본관''' ||[[개성 왕씨]] || || '''부군''' ||[[왕균(고려)|왕균]] || || '''관저''' ||정명전(貞明殿) || || '''생몰년도''' ||?년 1월 17일 ~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마지막 국왕 [[공양왕]]의 모비(母妃). == 생애 == [[연덕부원대군]]과 조씨의 딸로 순화후 왕유(王瑈, ? ~ 1360)의 장남 정원부원군 왕균[* 촌수로 따지면 15촌이다.]과 결혼해 1345년 [[공양왕|왕요]]를, 그 뒤에 [[왕우(고려)|왕우]]를 낳는다. 1389년 장남 왕요가 [[이성계]]를 비롯한 아홉 공신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니 이듬해인 1390년 4월 국대비의 존호를 받고 관저는 정명전(貞明殿)이라 불린다. 1391년 국대비 생일에 대사면이 이뤄져 [[이숭인]], [[하륜]], [[권근]] 등이 사면돼 수도 남경 밖에서 자유롭개 살 수 있게 된다. 공양왕이 남경에서 개경으로 환도해 왕씨도 개경으로 돌아온다. 이 해 7월에 [[왕대비 안씨]]와 국대비의 3대 조상에게 시호가 추증된다. 왕대비는 3대조까지 추증됐는데, 국대비 왕씨는 증조부모가 [[충렬왕]]과 [[정화궁주]]라서 조부모까지 2대에게만 추증된다. 11월에 이첨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왕씨는 아직 강건하고 병이 없었다. 1392년에도 국대비 생일에 사면이 있었고, 3월에 왕씨의 손자 [[정성군|세자 왕석]]이 [[명나라]]에서 돌아올 예정일이 잡혀, 공양왕으로부터 무사 귀국을 기원하는 후한 하사품을 받는다. [[고려사]]에서는 이후 언급이 전혀 없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왕대비 안씨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국대비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하는 정황 논리지만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는 어디까지나 공민왕이라는 조선조의 역사관[* 공민왕 이후의 고려 왕으로는 재위 순서대로 우왕, 창왕, 공양왕이 있는데, 조선조 역사관에 의하면 고려의 우왕, 창왕은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왕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 공양왕은 실권이 없는 괴뢰였기에 부정하기도 쉬웠다.]과 왕조 교체기의 특수성이 겹쳐 존재 자체가 붕 떠 버린 모양이다. == 가족관계 == * 부: [[연덕부원대군|양효공 왕훈]] * 모: 안의비 조씨 * '''본인: 삼한국 대비 왕씨''' * 배우자: [[왕균(고려)|삼한국 인효대공 왕균]] * 아들: [[공양왕|고려 공양왕]] * 며느리: [[순비 노씨]] * 손자: [[정성군|세자 왕석]] * 아들: [[왕우(고려)|정양부원군 왕우]] * 며느리: 노씨 * 손자: [[왕조(고려)|정강군 왕조]] * 손자: 왕관 [[분류:고려의 왕비]][[분류:개성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