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구승우}}}'''[br]'''具丞祐'''}}}}}} || || '''자''' ||형오(亨五) || || '''족보명''' ||구태우(具台祐) || || '''본관''' ||[[능성 구씨]] || ||<|2> '''출생''' ||[[1863년]] [[5월 18일]] || ||[[전라남도]] [[화순]] || ||<|2> '''사망''' ||[[1917년]] [[12월 30일]] || ||[[전라남도]] [[해남군]] || || '''묘소''' ||[[전라남도]] [[화순군]]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생애 ==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인 구승우(具丞祐)는 아버지 구교심(具敎潯)과 광주 노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 주요 활동 == 유림 대표였던 구승우는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항의, 봉기한 끝에 1907년 양회일을 주축으로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일대에 설치되었던 쌍산의소(雙山義所)에 참여하였다. 그는 창의(倡義) 때 군량미 여러 석을 의진에 제공하였으며 병서에 지식이 깊어 의진의 전략 구축과 군사들의 전술 훈련에도 관여하였다. 구승우는 또한 스스로 화약을 제조하기도 했으며 2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각 지역의 일본군 분견소를 공격해 전깃줄을 끊거나 총기와 총탄을 빼앗는 등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며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쌍산의소와 그의 행적은 '행사실기(杏史實記)', '습재실기(習齋實記)', '임전일록(臨戰日錄)' 등에 기록으로 남았다. 그러나 의병 부대가 도마치(刀摩峙)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체포된 의병장 양회일이 1908년에 장흥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의병은 해산을 맞이했다. 그 후 구승우는 해남의 산중으로 은신하여 수년간 서당 훈장으로서 학동들을 교육했다. 1917년 작고한 구승우에게는 2004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Popup.do?goTocode=0&mngNo=961100&kwd=%EA%B5%AC%EC%8A%B9%EC%9A%B0|참고출처1:공훈전자사료관]]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40812/8094297/1|참고출처2:동아일보]] [[https://koreaub.cs.go.kr/bbs/menu04.php?lo_do=%EC%A0%84%EB%9D%BC%EB%8F%84|항일의병기념공원]]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능성 구씨]][[분류:화순군 출신 인물]][[분류:1863년 출생]][[분류:1917년 사망]][[분류:건국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