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우)] [include(틀:장비)] ||<:><-4>'''[[고사성어|{{{#white 고사성어}}}]]'''|| ||<:>{{{+5 '''關'''}}}||<:>{{{+5 '''張'''}}}||<:>{{{+5 '''之'''}}}||<:>{{{+5 '''勇'''}}}|| ||<:>빗장 관||<:>베풀 장||<:>갈 지||<:>용기 용|| [목차][clearfix] == 개요 == [[중국]]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촉한]]의 황제 [[유비|한 소열제 유비(劉備)]]의 최측근 장수인 [[관우]]와 [[장비]]의 용맹(勇猛)을 이르는 말로 매우 용맹한 장수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중국 [[청나라]] 시대 역사학자 조익(趙翼, 1727~1812)의 저서 22사차기(二十二史箚記) 제96장에 나오는 얘기로 조익은 24사를 검증하다가 [[한나라]] 이후 용맹한 장수의 활약상에 관우와 장비의 이름에 빗대는 것을 보고 문득 흥미를 느꼈는지 이런 사례를 모아 설명하였다. == 원문 == >'''한나라 이후로 용맹하다고 칭하는 자는 반드시 관우와 장비를 든다'''. 그런 용맹이 두 사람의 열전에 보이는 게 있다. >[[원소(삼국지)|원소]]가 [[안량]]을 보내 백마에서 [[유연(삼국지)|유연]]을 공격하게 하자,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유연을 구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수레를 바라보고는 바로 말을 채찍질하여 만인 가운데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왔는데, '''원소의 장수 가운데 관우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사 삼국지]] 촉서 권36 관우전] >[[장판 전투|당양의 싸움]]에서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가면서 장비에게 [[기병]] 20명을 통솔하여 뒤를 막도록 하였는데, 장비가 물에 의지해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뜬 채 창을 비껴들고 "이 몸은 장익덕이다. 와서 함께 생사를 가름지을텐가!" 라고 외치니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정사 삼국지]] 촉서 권36 장비전] >---- >두 사람의 용맹함이 전기에 드러난 것은 이에 그치지만, '''당시 그 위명에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위나라의 [[정욱]]은 "유비는 영웅의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만인을 대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사 삼국지 위서 권14 정욱전] >[[유엽]]은 조조에게 [[한중]]을 취한 기세를 타고 나아가 촉을 취하도록 권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늦추면, [[제갈량]]은 치국에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와 장비는 용맹하게 3군을 거느려 장수가 될 터'''이니, 곧 범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국지 위서 권14 유엽전] >이는 [[위(삼국시대)|위나라]] 사람이 그 용맹에 감복한 것이다. > >[[주유(삼국지)|주유]]는 은밀히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유비는 효웅의 풍채이며 '''관우와 장비라는 [[곰]]·[[호랑이]]같은 장수가 있으니''', 반드시 오래도록 굽혀 남에게 쓰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손권에게 제시하는데, 오나라에 손님으로 붙잡아두고 온갖 보물과 산해진미, 미녀를 안겨서 바보로 만든 유비를 관우·장비 억제기로 쓰고 그 둘이 뭉치지 못하도록 따로 떨어뜨린 상태로 자기에게 맡기는 것. 그러면 능히 천하통일을 꾀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주유는 남군공방전 당시 잠시나마 장비를 용병 개념으로 부려본 적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정사 삼국지 오서 권54 주유전] >이는 [[오(삼국시대)|오나라]] 사람들이 그 용맹에 감복한 것이다. >---- >그 뿐만이 아니라, 진(晉)의 [[유하(동진)|유하]]가 매번 적을 공격할 때마다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고 날카로운 공격을 꺾으니, [[기주]][* 이 지역은 공손찬 휘하 시절 유비가 관할하던 평원과 붙어있는 지였으로, 기주를 근거지로 얻은 원소와 수 차례 싸우기도 했다. 유비가 평원에 있었던건 고작 3여 년이었고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위명이 그곳에선 남아 있었다는 것.]에서는 '''그를 관우·장비와 비교하였다'''.[* 유하(劉遐)의 자(字)는 정장(正長)이며, (기주) 광평(廣平) 역양(易陽) 사람이다. 성격은 결단성이 있고 강하였으며, 궁마(弓馬)를 익혔으며, 도량이 넓고 용장(勇壯)하였다. 천하가 대란을 맞이했을 때, 유하는 오주(塢主)가 되어 매번 적을 공격하였는데 장사를 이끌고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고 날카로운 공격을 꺽으니 [[기주]] 방면에서는 그를 장비·관우에 비견하였다. - [[진서|진(晉)서]] 권81 유하전] >부진[* [[부견]]의 진나라,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서 염부·양수를 장현정에게 사신으로 보내 본국 장수를 자랑하면서 [[부비(전진)|왕 비]][* 신흥왕 [[부비(전진)|부비]]를 말한다.]·[[등강(전진)|등강]]이라는 자들이 있는데 '''관우·장비와 같은 사람들로서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다'''고 했다.[* 진서 권112 부생 재기] >독발녹단[* [[남량]]의 제3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402~414).]이 송창에게 인재를 구하자, 송창이 "양숭·조창은 '''무예가 관우·장비와 같다'''"고 말했다.[* 진서 권126 독발녹단 재기] >이상은 근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조흠이 그를 중히 여겨 "이현서는 '''오늘날의 관우·장비'''이다"라고 말했다.[* 진서 권120 이상 재기] >[[송(육조)|송]]의 설동과 고진지[* [[유송]]의 [[명장]] 단도제(檀道濟)의 심복들.]는 모두 용맹과 힘을 가지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관우·장비에 견주었다'''.[* [[송서]] 권43 단도제전] >노상[* 노상은 일세의 건장(健壯)하고 날랜 자이며, 모두 만인적(萬人敵)에 비유했다고 한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심경지는 설안도에게 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설안도가 노상을 바라보다 곧장 말을 달려 크게 소리지르며 바로 그를 찌르니, 노상이 응수하였으나 거꾸러졌으며, 당시 사람들은 '''관우가 안량을 벤 것도 이거보단 덜 지릴 듯'''이라고 하였다.[* [[남사]] 권40 설안도전] >[[제(육조)|제]]의 원력생은 주먹과 용기가 유달리 뛰어났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관우·장비에 견주었다'''.[* [[남사]] 권44 문혜태자전] >[[북위]]의 [[양대안]]은 용맹하고 과감하여, 세상에서 '''관우·장비가 그보다 낫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위서]] 권73 양대안전] >최연백이 막절념생을 토벌하여 이기고 나자, 소보인이 "최공은 '''옛날의 관우·장비'''이로다" 하였다.[* 위서 권73 최연백전] >[[진(육조)|진(陳)]]의 오명철이 북으로 고제[* 고씨의 제나라, [[북제]]]를 정벌하자 위파호 등 십만의 무리가 와서 맞섰는데, 어떤 서역사람이 있어 화살을 헛되이 쏘는 법이 없었다. 오명철이 [[소마하|소마가]]에게 이르기를 "만약 저 호인을 죽이면 적군은 기가 꺾일 것이다. '''자네는 관우·장비의 명성이 있으니 안량을 벨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소마가는 바로 진영을 나가서 작은 창을 던져 그를 죽였다.[* [[진서(남조역사책)|진(陳)서]] 권31 소마가전] >---- >이상은 모두 각 사서에 보이는 것이다.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의 이름은 단지 같은 시대 사람들만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후 수백 년 동안에도 역시 두려워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위세와 명성이 드리워진 바가 지금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으니, '''하늘이 낳은 신묘한 용맹이 진실로 헛되지 않다'''. == 관우·장비에 비견된 장수들 == 이십이사차기에서 조익이 언급한 관우와 장비에 견주는 무인은 총 13인이다. * [[동진]](晉)의 [[유하(동진)|유하]](劉遐, ?~326) * [[성한]](成漢)의 이상(李庠, 247~301)[* [[문앙]]과 견주었다는 언급도 있다.] *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의 [[부비(전진)|부비]](苻飛, ?~?), [[등강(전진)|등강]](鄧羌, ?~?) * [[남량]](南凉)의 양숭(梁崧), 조창(趙昌, ?~?) * [[송(육조)|송(宋)]]의 설동(薛彤), 고진지(高進之, ?~436), 설안도(薛安都, 410~469) * [[제(육조)|남제(南齊)]]의 원력생(垣曆生) * [[북위]]의 [[양대안]](楊大眼, ?~518), 최연백(崔延伯, ?~525) * [[진(육조)|진(陳)]]의 [[소마하]](蕭摩訶) 이십이사차기를 읽고 각 사서 원문을 살펴본 이에 따르면 조익이 언급한 장수들 말고도 그 장수들과 같이 언급되는 장수들이 더 있는데 전진(前秦)의 팽월(彭越, ?~?), 범구난(范俱難), 서성(徐盛, ?~?), 남량(南凉)의 장목(張穆), 변헌(邊憲), 문제(文齊), 양반(楊班), 남제(南齊)의 채도귀(蔡道貴)[* 위에서 얘기가 나온 원력생과 함께 관우·장비에 견주었다고 한다.]가 추가된다고 한다. [[북송|송나라]] 시기, 삼국지 얘기가 민간문학으로 유행하기 전에도 이미 관우와 장비의 유명세는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고 용맹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다. 마이너하게 [[감녕]]과 [[장료]]에 비교되기도 한다. [[안경사(당)|이존효]]가 감녕과 장료와 비교된 장수. 일본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다 타다카츠]]의 용맹을 보고 그를 장비에 비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류:삼국시대(중국)]][[분류:고사성어]][[분류: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