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당나라의 장군[br]{{{+1 郭孝恪 | 곽효각}}}}}}''' || ||<:>'''{{{#fff 작위}}}''' ||양책군공(陽翟郡公) || ||<:>'''{{{#fff 성}}}''' ||곽(郭) || ||<:>'''{{{#fff 이름}}}''' ||효각(孝恪) || ||<:>'''{{{#fff 출신}}}''' ||허주(許州) 양책현(陽翟縣) || ||<:>'''{{{#fff 생몰년도}}}''' ||? ~ 64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장수. 허주(許州) 양책현(陽翟縣) 출신. == 생애 == 곽효각은 젊은 시절에는 범상치 않은 포부가 있었지만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서 부친과 형으로부터 무뢰한 취급을 받았다. [[수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소년 수백 명을 이끌고 [[이밀]]에게 의탁하였고 이때 [[이세적]]과 함께 여양에 주둔하였다. 619년 이밀이 멸망한 뒤 곽효각은 입조하여 송주(宋州) 자사로 임명되고 양책군공(陽翟郡公)에 봉해졌다. 이후 [[두건덕]]이 여양을 공격할 때 두건덕 아래에 있던 이세적[* 이세적은 아버지가 두건덕에게 사로잡혀서 인질로 종군했다.]곽효각은 당나라에 귀순하도록 종용했고 이세적은 두건덕에게 찬성했다. 620년, 두건덕의 처형인 조단(曹旦)이 약탈을 자행하여 인심을 얻는데 실패하자, 곽효각은 이세적과 함께 입조한다. 곽효각은 두건덕을 물리칠 계책을 진왕 이세민에게 건의하기도 했으며, 왕세충과 두건덕이 평정된 뒤에 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곽효각은 패주(貝州)·조주(趙州)·강주(江州)·경주(涇州)의 자사를 역임하면서 유능하다는 명성을 얻었고 입조하여 태부소경, 좌효위장군을 지냈다. 642년, 곽효각은 양주(凉州) 도독, 안서 도호, 서주(西州) 자사로 전출되었다. 곽효각이 부임하기 이전인 641년 돌궐에서는 [[을비돌륙가한]]이 [[을비사발라엽호가한]]을 죽이고 토화라(吐火羅)를 멸망시켰다. 을비돌륙가한은 서돌궐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사신을 구류하며 자기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림은 물론 군대를 파견하여 이주(伊州)를 노략질하였다. 곽효각은 오골(烏骨)에서 출병하여 을비돌륙가한을 물리쳤고, 을비돌륙가한이 다시 처월(處月)과 처밀(處密) 부락을 파견하여 천산(天山)을 포위하자 이번에도 곽효각은 이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644년, 언기의 국왕인 용돌기지(龍突騎支)가 서돌궐에 귀순하며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곽효각은 언기를 평정하도록 주청하여 서주도(西州道)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임명되고 군대를 지휘하며 은산도(銀山道)로 출병하여 용돌기지를 사로잡았다. 곽효각은 용율파준(龍栗婆准)을 언기의 섭정으로 남겼지만, 서돌궐의 굴리철(屈利啜)이 군대를 이끌고 용율파준을 유폐한 뒤에 곽효각을 추적하자, 곽효각은 은산에서 굴리철의 침공을 물리친다. 647년, 곽효각은 곤구도(崑丘道) 부대총관(副大總管)으로 임명되어 [[글필하력]], [[아사나사이]]와 함께 구자국(龜玆國)을 정벌한다. 다음해인 648년, 당나라는 구자국을 함락시키고 구자국의 왕인 백가려포실필(白訶黎布失畢)을 사로잡았지만 구자국의 대신인 나리(那利)가 단신으로 달아나 몰래 서돌궐의 군사를 끌어들여 곽효각을 습격했다. 이때 곽효각은 성 밖에 주둔해 있었는데 나리에 대비하라는 조언을 듣지 않고 방비를 게을리했다. 결국 나리가 성 안에 있는 투항병들과 함께 곽효각을 습격하자, 곽효각은 이들에 맞서 싸웠지만 화살에 맞아 아들인 곽대조(郭待詔)와 함께 전사하였다. 태종은 곽효각의 전사 소식을 듣고 곽효각이 방비를 게을리하다가 전사했다고 여겨 곽효각의 관작을 박탈했지만 뒤에는 곽효각의 죽음을 불쌍히 여겼다. [[고종(당)|고종]]이 즉위한 뒤에는 관작이 추복되었다.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4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