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1 [[共]][[治]][[帝]]}}} 공동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공치제는 서로 부모자식, [[형제자매]], [[친구]], [[부부]]인 관계가 많으며 수는 앞의 예시의 특성상 2명이 대부분이다. 다만 3, 4명이 공치제인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공치제라 하더라도 한쪽 공치제가 통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엔 다른 공치제가 단독군주로서 기능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아기]]인 [[카이사리온|아들]]을 공치제로 임명하고 자기가 사실상 단독군주로 군림한 사례이다.] [[로마 제국]]의 [[사두정치]] 시기엔 공치제가 4명에 달했다. == 서양 == 공치제는 명목상 같은 [[황제]]이긴 하나 그 안에 [[위계질서]]가 없지는 않았다. 기존 황제가 누군가를 공치제로 임명했을 경우, 기존 황제는 일명 '선임황제'의 [[개념]]으로 다른 공치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공치제 간의 위계질서의 예시로 [[로마 제국]]이 있는데, [[사두정치]]로 [[제국]]을 4분할해 4명의 황제가 건재할 때도 그중에서 먼저 즉위한 황제가 나머지 3명을 통솔하는 방식이었다. 다수의 공치제가 있을 경우 그 안의 [[위계]]에 따라 명칭은 세분화된다. 사두정치는 제국을 두개로 분할하여 황제 두 명당 한 구([[區]])[* 여기서 두개로 분할된 제국 하나당 두 제국이 이루는 대제국의 [[행정구역]]이 된다.]를 통치하는 방식인데 두 명이 같은 계급이 아닌 높은 계급의 황제를 정제(正帝), 그를 보좌하는 황제를 부제(副帝)[* 군주의 부하인 군주라는 점에서, 동양권의 [[제후왕]]과 비슷하다.]로 같은 황제여도 위계구분을 철저히 했다. 이것이 행정구역 하나당의 황제들로 2개의 행정구역을 합하면 정제가 두 명인데, 이 정제 간에도 먼저 즉위한 정제가 늦게 즉위한 정제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선임황제'란 개념이 존재했다. 즉, 같은 정제여도 즉위 순서에 따라 분명한 위계가 있으며 정리를 해보면 선임 정제 > 정제 > 부제 순으로 위계가 나뉘어지는 것이다. 참고로 로마의 부제는 [[동양]]의 [[제후]]와 비슷하지만, 정제가 죽거나 퇴위하면 정제위 계승권한이 있었다. 이를 보면 부제는 제후의 속성을 가졌으며 동시에 [[황태자]]의 속성도 띄고 있는 것이다. 공치제의 장점은 상술한 대로, 대제국도 통치자가 여럿이니 다스리기 쉽다는 점이다. 동쪽에 있는 단독황제의 경우 서쪽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진압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다른 공치제가 서부를 다스린다면 서부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제압이 가능하다. 단점으론 제국간 이질감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황제가 여럿이니 [[권력]] 집중이 안되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다 각 제국당 따로 계승이 이뤄지기에 [[이름]]만 같고 실질적으론 다른 나라가 돼 버릴 가능성도 크다. 결론적으로 이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이를 증명하듯 제2차 사두정치 시기엔 황제간 내전이 일어났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각 구들을 통일하는 결말에 이르렀다. 한편 [[선거군주제]] 국가에서 선거제를 무력화 하기 위해서 공치제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 초기 [[프랑스 왕국]]의 경우 왕이 [[전쟁]]에 나갈 때 내치를 핑계로 후계자를 공치제로 임명해 달라고 [[유권자]]에게 요구하였고 이런 경우 [[선왕]]이 서거할 경우 공동왕에 임명된 [[왕세자]]가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선거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도 초기 황제의 칭호 중 하나였던 [[로마-독일 왕|로마 왕]]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를 통해서 [[선거]]를 무력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비슷하게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황제를 옹립할 수 있다는 공화제적 [[전통]] 때문에 [[세습]]은 가능했지만 왕조교체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황태자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여 세습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려 하였다. 여왕이 이웃 국가의 군주와 결혼해서 양국을 하나로 통합해 함께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다만 이 둘은 상대의 모국에 대한 통치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2개의 왕가에서 각자 왕을 옹립하여 독재를 막았다. == 동양 == 대표적으로 [[베트남]]의 [[쯩 자매]], 그리고 [[떠이선 왕조]]의 초대 황제 [[타이득]]이 [[민제(레)|민제]], [[꽝쭝]], [[깐틴]]과 함께 공치제로서 [[국가]]를 통치한 사례가 있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도 공치제와 유사한 경우인데 [[정이대장군]]이 다스리는 [[막부]]가 세워지기는 했으나 의외로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천황의 [[실권]]이 어느정도는 남아있어서 [[관동]]을 위시한 일본 동부 지방은 가마쿠라 막부가 통치했지만 [[긴키 지방]] 등의 일본 서부에는 [[천황]]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일본은 서쪽에서는 천황이 군림하고 동쪽에서는 쇼군이 군림하는 공치제 체제에 준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에 [[조큐의 난]]과 [[원나라의 일본원정]]으로 인해 남아있던 천황의 실권까지 막부에 빼앗겨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 시대에 천황은 완전한 허수아비 [[바지사장]]으로 전락한다. 중국의 경우 [[진승·오광의 난]] 당시 정왕 [[진승]]이 [[오광]]을 부왕에 임명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공동군주 개념은 동양에서는 흔한 개념은 아니었다. [[몽골]], [[한국]] 등에서는 공동군주의 사례가 없었다. 애초에 중국 등 [[중화권]]에서는 아예 한 나라에 군주는 하나라는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있어서 불가능했다. 다만 공동군주 개념은 없어도 이와 준하는 사례는 있었는데 [[상왕]]과 [[수렴청정]], [[대리청정]] 등이었다. 상왕은 [[작위]]가 [[토지]]에 딸리지 않는 동양에서 주로 발달했고, 상왕이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기가 실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하는 경우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인세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제도화가 되었는데 너무 관행이 되다 보니 인세이가 사실상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천황들은 상황이 되는 길을 밟았다. 다른 하나는 베트남의 [[쩐 왕조]]인데, 쩐 왕조는 독특하게도 역대 군주들 중에 상황이 된 사람이 6명에 달한다. 일본은 아예 1301~[[1305년]]에는 상왕만 무려 다섯 명이 있던 때도 있었다. 수렴청정과 대리청정은 사실 [[서양]]에서도 [[섭정]]이라는 개념으로서 존재하며 막상 하더라도 공동군주 개념에 가까울 만큼 잘 된 일은 없지만[* 애초에 동양에서는 [[서열]]이 딱딱 정해져 있어서 실권을 쥐더라도 형식상 군주를 존중해줘야 했고 수렴청정의 경우 일정 시기가 지나면 물러나야 했고, 대리청정은 그나마 물러날 일이 거의 없는데 이 경우는 물러날 일이 없을 정도로 왕의 [[건강]]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수렴청정은 그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시대상 제약이 많았다.] 그래도 [[세종(조선)|세종]]-[[문종(조선)|문종]] 사례처럼 사실상의 공동군주나 다름없을 정도로 이상적인 체제가 되기도 했다. [[분류:군주제]][[분류:로마 황제]][[분류:스파르타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