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송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77449 0%, #2e8b57 20%, #2e8b57 80%, #277449); color: #ece5b6" '''남송 제16대 황제[br]{{{+1 공황제 | 恭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남송공종.jpg|width=100%]]}}} || ||<|2> '''출생''' ||[[1271년]] [[11월 2일]] || ||[[남송]] [[항저우시|임안부]] 전당현[br](現 [[저장성]] [[항저우시]]) || ||<|2> '''즉위''' ||[[1274년]] [[8월 12일]] || ||[[남송]] [[항저우시|임안부]] 황궁[br](現 [[저장성]] [[항저우시]] 린안구) || ||<|2> '''사망''' ||[[1323년]] [[5월 31일]] (향년 51세) || ||[[원나라|원]] [[간쑤성|하서]][br](現 [[간쑤성]] [[장예시]])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ece5b6 제16대 황제}}}''' || ||[[1274년]] [[8월 12일]] ~ [[1276년]] [[2월 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조(성씨)|조(趙)]] || || '''휘''' ||현(㬎) || || '''부모''' ||부왕 [[도종(송)|도종]][br]모후 [[황후 전씨(남송)|황후 전씨]] || || '''형제자매''' ||7남 4녀 중 6남 || || '''배우자''' ||쿠빌라이칸의 서녀 || || '''자녀''' ||1남 || || '''종교''' ||[[티베트 불교]] || || '''작호''' ||가국공(嘉國公) → 영국공(瀛國公) || || '''묘호''' ||'''[[공종]](恭宗)'''[*A 비공식 묘호.] || || '''시호''' ||공황제(恭皇帝) || || '''존호''' ||효공의성황제(孝恭懿聖皇帝) || || '''연호''' ||덕우(德祐, [[1275년]] ~ [[1276년]]) || || '''절일''' ||천서절(天瑞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의 제16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7대 황제.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공황제(恭皇帝)이고, 존호는 효공의성황제(孝恭懿聖皇帝)이다. 휘는 현(顯). [[연호]]는 덕우(德祐)를 썼으며[* 때문에 그를 덕우황제라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공제라고 부르지만 다른 호칭으로는 비공식적으로 공종(恭宗)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 [[생애]] == === [[황제]]로서의 [[삶]] === [[송도종]]의 6남으로, 황후 전씨(皇后 全氏) 소생이다. 동복형[* 도종의 정실, 후실이 낳은 아들 중에서는 둘째 아들에 해당함.] 조서(趙舒)가 유아기때 사망하였고 도종의 첫 아들인 광충선왕(廣沖善王) 조작(趙焯) 역시 2살때 사망해서 사실상 도종의 적장자였다. 1273년 가국공(嘉國公)에 봉해졌으며 1274년 아버지인 도종이 34살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겨우 4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도종의 살아있던 아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숙비 양씨 소생인 익왕(益王) 조시(趙昰)이다. 휘를 고쳐 조하라고 부른다. 공제 즉위 후 길왕(吉王)에 봉해졌으며 훗날 [[단종(송)]]이 되었다.] 도종 생전에 양양이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대몽골 방어선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원나라]]는 옛 남송의 투항군을 흡수한 대군을 이끌고 공세에 나서 장강 상류의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이 때 [[가사도]]는 원나라 대장 [[바린 바얀]][* [[한자]]로는 '백안(伯顔)'으로 표기됨]에게 화의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심한 공세를 당했다.[* 원나라가 이전에 가사도의 화의를 받아들여 준 것은 내부 황위 계승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사라지고 양양도 함락한 이 시점에서 원나라가 남송이 요청한 화의를 받아 줄 리가 만무했다.] 가사도의 화의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과거 가사도의 거짓말[* 가사도는 몽케 칸의 침략 당시, 악주 지방 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종과 조정에 알리지 않은 채 몽케 칸의 죽음으로 급히 돌아가려고 한 쿠빌라이와 몰래 '밀약' 을 맺고 쿠빌라이의 철수를 보장해주는 대신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너 철군하는 쿠빌라이 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모션을 취했다. 가사도는 이때 쿠빌라이 군에게 경미한 피해를 입혔는데, 밀약 내용을 숨기고 자신이 쿠빌라이 군을 배후에서 공격했다고 조정에 보고해 공을 획득했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송나라 조정은 가사도에게 13만 군대를 이끌고 바얀이 이끄는 20만의 원나라군과 싸우게 했다. 가사도는 어쩔 수 없이 출전했으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한 큐에 박살남으로써 남송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1276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대군이 수도 임안을 포위했다. 남송의 조정은 화의를 요청했으나 원나라 측은 당연히 거절했다. 이때 바얀은 “[[조광윤|너희 조상]]이 어린 황제([[후주#s-2]](後周)의 공제 [[후주 공제|시종훈]])의 자리를 빼앗고 [[북송|나라]]를 세웠다. 그러니 그 후손인 어린 황제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라면서 힐문했다고 한다. 결국 공제는 할머니 사태후, 어머니 전태후 등과 함께 항전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장세걸]], [[육수부]], [[문천상]]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단종(송)|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서 계속 항전했다. 그러나 남송은 공제의 항복으로 사실상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멸망 이후의 삶 === 바얀은 송나라의 사료[* 원래 바얀은 임안을 깡그리 불태우고 사료(史料)들도 훼손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 문인이 역사를 없애버리면 그 나라는 의미가 없다라는 식으로 설득했고 바얀과 원나라는 임안에 있던 송나라의 사료들을 그대로 싣고 대도로 옮겼다. 그래서 훗날 송나라의 [[사서]] 《[[송사]]》를 만드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 황실의 보물들을 싣고, 공제를 포함해서 할머니 사태후[* [[이종(송)|이종]]의 황후], 공제의 모친 전태후, 남송의 황족들과 임안에 남아있던 대신들을 원나라 수도 대도로 압송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강의 변]] 당시 [[송휘종|휘종]], [[송흠종|흠종]], 끌려온 황실 사람 등이 금나라에서 겪은 고초와 달리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공제를 불러들여 절을 받은 다음 잔치를 열고 흥겨워했지만 그의 황후 차븐은 예로부터 1,000년 넘게 가는 나라는 없으니 언젠가 자신의 후손들에게도 이런 날이 올까봐 불안해 했다고 한다.[* 그 우려는 정확히 들어맞아 후에 원나라도 철저히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북원 정복 이후 원나라의 후신을 칭하고 보르지기트(보르지긴) 씨족과의 통혼으로 아이신기오로 황실이 원나라 보르지긴 황실의 방계 후손이 되기까지 한 [[청나라]]는 원나라보다 더욱 철저히 멸망당하고 만다.] 그 후 쿠빌라이에 의하여 영국공(瀛國公)으로 봉해졌으며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고 첩으로 원나라 황실 출신의 '한록로 매래적'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정상인이었던 그는 성년이 되면서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쿠빌라이 칸과 원 조정에서는 숙청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쿠빌라이가 어느 날 황금용이 대도 궁궐 내 기둥을 휘감고 있다가 갑자기 발톱을 세워 그를 향하는 것을 본 꿈을 꿨는데, 다음날 아침 조회때 공제가 우연스럽게도 그 기둥 앞에 있자 쿠빌라이는 공제를 숙청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날 부인과 함께 우연히 쿠빌라이와 원나라 대신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그의 아내였던 원나라 공주는 매일같이 쿠빌라이에게 남편을 살려달라고 빌었고, 공제 역시 쿠빌라이에게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1288년 쿠빌라이의 허락을 받아 출가하여 라마승이 되었고, 이무렵 어머니인 전태후 역시 비구니가 되었다. 이후 공제는 티벳어를 열심히 익혀 티벳 불교의 불법에 통달했으며 티벳 불교 서적 번역, 주해를 해서 '합존법사'로 불렸고 현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원나라는 남송의 황제였던 그를 계속 감시했으며, 결국 1323년 52세의 나이에 끝내 사사되었다. 당시 공제를 감시하던 이들은 공제가 지은 시의 구절을 빌미로 삼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寄語林和靖, 梅開几度花. 黃金臺上客, 無復得還家.''' >임화정(임포)[* [[북송]] 시기의 화가로서 평생 결혼도 안하고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 그림만 그렸다고 해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별명까지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에게 전하노니 매화가 몇 번이나 피었노라. 황금 누대의 귀빈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노라. 당시 황제였던 [[영종(원, 5대)|영종]]은 첩자들이 '영국공이 흥얼거린 싯구는 남인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라고 보내온 것을 보자 곧바로 공제를 잡아들인 뒤, 스스로 자결하라고 명했다. 원나라 공주와의 사이에서 얻은 외아들 조완보[* 원나라 순제때까지 살아있었고 반원운동이 전개되는 등의 움직임 속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나라가 그를 강제로 사주로 옮겨 살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와 기타 끌려온 송나라 사람들의 자손들은 원나라 말기에 모두 살해되었고, 이들의 혼백들이 송나라 조상의 묘에서 통곡하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역시 머리를 깎게 한 뒤 출가시켜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몰 연도와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원 말기에 결국 아버지처럼 사사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송 황실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 야사 == [[야사(역사)|야사]]에서는 공제의 첩 한록로 매래적이 나중에 [[명종(원)|원 명종]]의 후비가 되었는데 이미 공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이를 몰랐고 자신의 아들인줄 알았으며 그 아이가 훗날 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원)|혜종]]이라고 [[카더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시황제]]가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떡밥]]과 더불어 유명하다. 사실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가 없었기 때문에 친자식 유무는 사실상 군주의 승인과 양육 환경으로 결정났다. == 대중매체 == [[넷플릭스]] 드라마인 [[마르코 폴로(드라마)|마르코 폴로]]에서 등장하는데 현실과 차이점이라면 이 드라마에서는 저항 세력의 희망을 꺾어야 한다고 아흐마드 파나카티의 말을 들은 쿠빌라이에게 살해당한다. 이 광경을 본 남송 백성들은 격분하고, 폭도가 되어 폭동을 일으킨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 [각주] [[분류:1271년 출생]][[분류:1323년 사망]][[분류:송나라/황제]][[분류:항저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