恭陵 [목차] == [[조선왕릉]] == [include(틀:조선왕릉)] [[파일:1580_5741_264.jpg]] [[파일:공릉.jpg]] [[조선]]왕조 8대 임금 [[예종(조선)|예종]]의 정비인 [[장순왕후]]가 안장된 단릉이다.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파주삼릉]] 안에 자리잡고 있다. === 역사 === 1461년([[세조(조선)|세조]] 7년) 12월 5일에 당시 왕세자였던 [[해양대군]](훗날 8대 왕 [[예종(조선)|예종]])의 부인인 왕세자빈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62년(세조 8년) 2월 25일에 파주 보시동(普施洞)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2025_002|조선왕조실록 기사1]]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2025_003|조선왕조실록 기사2]] 그러다가, 이후 1470년([[성종(조선)|성종]] 1년) 1월 22일에 왕세자빈 한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恭陵)이라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1022_006|조선왕조실록 기사]] 그렇게 왕릉으로 격은 높아졌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세조(조선)|세조]]의 왕비)의 명에 따라서 추가적인 의물(儀物)들을 가설하지 않았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101025_008|조선왕조실록 기사]] === 형식 === 공릉은 왕릉의 격을 가지고 있지만, 능의 주인인 장순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고, 왕릉으로 격이 올라갈 당시에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서 왕릉의 격에 맞는 추가적인 석물을 설치하지 않아서 간소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 아무리 그래도 원(園)의 격에도 맞지 않는 것 같은데.. -- 대표적으로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며, 무석인 1쌍이 생략되어 있고 석마와 석양, 석호도 2쌍씩이 아니라 1쌍씩만 설치되어 있다. 또한 망주석 1쌍도 생략되어 있다. 장명등은 다른 왕릉의 그것에 비해서 꽤나 높이가 낮지만, 봉분은 꽤나 큰 편이다. 비각의 표석에는 "조선국 장순왕후 공릉(朝鮮國 章順王后 恭陵)"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표석이 세워진 년도는 숭정 기원후 190년(1817년, [[순조]] 17년)이다. == 고려왕릉 == [[고려]] 7대 [[목종(고려)|목종]]의 첫 무덤으로서 [[현종(고려)|현종]] 때 성의 동쪽으로 이장하고 [[의릉]](義陵)으로 고쳤다. [[충렬왕]] 때 [[도굴]]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개성시]] 동쪽에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장소는 알 수 없다. == 중국황릉 == === [[후한]]의 6대 황제 [[한안제|안제]]가 안장된 황릉 === === [[당나라]] 추존 황제 [[의종(당 추존)|의종]]이 안장된 황릉 === [[허난 성]] 옌스 시에 있다. == 여담 == 서울시 노원구에 위치해 있는 [[공릉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이 쪽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마을인 공덕리(孔德里)와 태릉과 강릉이 위치해서 유래된 공릉2동의 옛 명칭인 '능골'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어졌기 때문. [[분류:파주시]] [[분류:조선왕릉]] [[분류:고려왕릉]] [[분류:중국황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