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73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제주 고씨]][[분류:고영희 가문]] [include(틀:토막글)] [include(틀:조선귀족)]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67f 0%, #005ba6 20%, #005ba6 80%, #00467f)" {{{+1 '''고희경'''}}}[br]'''高羲敬'''}}} || ||<|2> '''출생''' ||[[1873년]] [[7월 22일]] || ||[[조선국]]|| ||<|2> '''사망''' ||[[1934년]] [[2월 27일]] (향년 60세) || ||[[일본 제국]] [[도쿄]] 시바구 시로카|| || '''본관''' ||[[제주 고씨]]|| || '''가족''' ||아버지 [[고영희]], 아들 [[고흥겸]]|| || '''친인척''' ||손자 [[고중덕]]|| || '''학력''' ||[[육영공원]]||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귀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 생애 ==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되어 있는 정치인 고영희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885년]] [[개화파]]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인]]을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친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립 학교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1891년]] 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 업무를, 이후에는 황실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1902년]] 이재각이 단장을 맡은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영국에 다녀왔다. [[1906년]] 예식원 부경(副卿)과 제도국 의정관, 궁내부의 예식과장과 예식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일본 황태자를 맞는 봉영위원(奉迎委員)을 지냈다. 같은해 시강원에서 일하면서 영친왕의 강제 일본 유학 때 배종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었고, 고희경은 이왕직 사무관으로 계속 왕실 관련 업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순종의 가족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 [[고영희]]가 [[1916년]] 사망하자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가 [[1920년]] 백작으로 승급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고영희]]와 고희경 부자는 유일하게 2대에 거쳐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인물들이다. [[1934년]] [[2월 27일]] 도쿄 시바구 시로카네에 있는 자택에서 담낭염으로 사망하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 사후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아버지 고영희와 함께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1934년]] [[6월 1일]] 그의 작위를 습작 받은 고흥겸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고희경의 토지를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고,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결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고희경의 재산까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이후, 2년 뒤인 [[2009년]]에 고희경의 후손들이 고희경의 재산들을 자진하여 반납하기로 하였다. [[2007년]] [[12월 6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