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고홍석을 본명으로 하는 일러스트레이터, rd1=고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고홍석}}}'''[br]'''高洪錫'''}}}}}} || || '''창씨명''' ||다카야마 코시(高山洪錫) || || '''본관''' ||[[제주 고씨]][* 장흥백파.] || ||<|2> '''출생''' ||[[1900년]] [[10월 6일]] || ||[[전라남도]] [[담양군|창평군]] 군내면 유천리[br](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인근의 삼천리·용수리와 함께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광문]]·[[고광순]]·고광채·고광훈·고제량과 [[고영한]] 전 대법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82년]] [[6월 23일]] (향년 81세)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19호 || || '''상훈''' ||건국포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이다. == 생애 == 1900년 10월 6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유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홀로 익히던 중, 18세 되던 1923년 '우리들 조선인은 약한 민족이므로 공부에 힘써 강한 민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강연을 듣고 공부에 뜻을 세워 1924년 광주 소재 사립보통학교인 흥학관(興學館)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교사인 김재명(金在明)으로부터 '[[경술국치|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조선동포가 배움이 없었기 때문이니 마땅히 배움에 힘써 조선을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는 내용의 교육을 받자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을 이끌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듬해 흥학관을 졸업한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사립동경수의학교(私立東京獸醫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28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전라북도]] [[전주시|전주부]] 상생정(현 [[전주시]] [[완산구]] [[태평동]])에 거주하는 한편, 재목상(材木商)을 운영하며 생활하다가, 1940년 [[중일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제의 전시수탈이 극악해지자 침체된 국내 독립운동을 다시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말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신촌마을에 있는 육우정(六愚亭)이라는 정자의 벽면에 연필로 '대한독립 만세, 동포여 자각하자' 라는 내용을 크게 써서 주민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4월 2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48&evntId=0034990659&evntdowngbn=Y&indpnId=000002175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82년 6월 23일 병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고홍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2002년 10월 31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담양군 출신 인물]][[분류:제주 고씨 장흥백파]][[분류:1900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건국포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