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생애 == || [[파일:고트프리트 페더.jpg]] || || '''{{{#000,#fff 고트프리트 페더[br]{{{-2 Gottfried feder[br](1883년 1월 27일 ~ 1941년 9월 24일)}}}}}}''' || >''''이자 노예제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최악의 제도이다.'''' >---- >독일 육군에서 페더의 교육중 [[아돌프 히틀러]]를 감명시킨 주제이다. '''고트프리트 페더'''(Gottfried Feder, [[1883년]] [[1월 27일]] ~ [[1941년]] [[9월 24일]])는 독일의 건축기사이자 경제학자로, 초기 [[나치당]]의 주요 당원으로서 경제 이론가를 맡았다. [[아돌프 히틀러]]를 당에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1883년]] [[1월 27일]]에 [[독일 제국]] [[뷔르츠부르크]]에서 공무원 한스 페더와 마틸데 페더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스바흐]]와 [[뮌헨]]에 있는 인문주의 학교를 다닌 후 [[베를린]]과 [[취리히]]에서 공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08년]]에 건설 회사를 설립하였다. 후에 [[불가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공공 건물을 세웠다. [[1917년]]부터 스스로 재정 정치와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부유한 [[은행]]을 향한 적개심을 키워나갔으며 [[1919년]]에 《Brechung der Zinsknechtschaft》를 저술하였다. 나중에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자]]를 없애기 위한 일종의 대책 위원회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에 [[안톤 드렉슬러]], 디트리히 에카르트, 카를 하러와 함께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히틀러의 신임을 얻은 우익 경제인들이 페더를 공격하였고, [[1934년]] 히틀러가 당내 좌익 세력을 숙청하자 페더는 내각에서 사임했다. [[베를린 공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1941년에 사망했다. ==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 == 그는 '창조적' 자본이나 '생산적' 자본과 대비되는 '투기적' 자본이 독일의 경제를 좀먹는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었다. 페더는 이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자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독일 투쟁' 동맹을 조직한 바 있었다. [[경제학]]에 절륜은 커녕 무지했던 [[히틀러]]는 이러한 페더의 강의에 감복하였으며 이자 노예제 철폐라는 페더의 호소에서 '신당 설립의 필수 전제들' 중 하나를 발견했고 '''"나는 다가오는 투쟁에 필요한 강력한 표어를 떠올렸다."'''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 정당에 들어가기까지 ===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을 조사하라는 독일 육군 본부의 명령에 따라 독일 노동자당에 대해서 별 생각없이 조사를 하고, 페더의 연설 차례가 나온후 별다른 소득없이 귀가하려던 찰나, 어떠한 교수가 페더의 연설에 '[[바이에른]]이 [[프로이센]]과 결별하고 [[오스트리아]]와 함께 남독일 국가를 수립해야한다'고 반론을 하는 것을 듣는다. 이에 [[히틀러]]는 갑자기 돌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훗날 회고하기로 '그 박식한 신사'라고 언급된 교수에게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심하게 몰아세웠는지 교수는 '흠뻑 젖은 푸들'처럼 행사장을 떠났고 연설에 소질이 없던 [[안톤 드렉슬러]]가 [[히틀러]]의 연설에 감복하여 [[독일 노동자당]] 입당을 제안하였다. 이제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당원 번호 555번, [[독일 노동자당]] 위원회의 일곱 번째 위원으로 등록됐다. [[히틀러]]는 [[드렉슬러]]에게 제안서를 받은 다음날 제2보병연대에서 일어나 그의 제안서를 찬찬히 읽어나갔고, 그 제안서에 자신의 의견과 상통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에 입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히틀러]]는 공산주의 정권에서 보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또 공산주의 정권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신이 직접 정당을 만드는것을 생각했지만 결국 페더의 연설과 그에 반박을 한 교수,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며 자신의 연설 실력을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시험하여 감복한 [[드렉슬러]]의 제안으로 인하여 결국 정당을 설립하지 않고 정당에 들어가게 된다. [[히틀러]]는 '''"내가 가난하고 재력이 없다는 것[* 본인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도 본인이 가난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가 세무공무원으로 벌어놨던 것이 꽤 된데다 고모들로부터 받은 유산도 제법 되었다. ]은 그나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름 없는 사람들 축에 든다는것, 우연에 따라 살 수도 있고 거들먹거리는 가까운 이웃조차 전혀 모르게 횡사할 수도 있는 수백만 명 중 하나라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페더가 없었고, [[히틀러]]가 교수에게 반론을 하는 일도 없어, [[드렉슬러]]에게 눈에 띄는 일이 없었더라면, [[히틀러]] 혼자 당을 설립했더라면, [[히틀러]]가 지금처럼 [[입지전적]]인 사람이 되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미지수이다.[* 당장에 [[드렉슬러]]도 정비공이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독일 노동자당]]의 40명 이상도 구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들은 대게 쉽게 사라졌다.] [[분류:1883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뷔르츠부르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