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hite 고구려의 유민}}}''' || || '''{{{#white 국적}}}''' ||[[고구려]] → '''[[당나라|당]]''' || || '''{{{#white 성씨}}}''' ||고(高) || || '''{{{#white 이름}}}''' ||자(慈) || || '''{{{#white 자}}}''' ||지첩(智捷) || || '''{{{#white 사망지}}}''' ||당 마미성(磨米城) 남쪽 || || '''{{{#white 묘지}}}''' ||당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락향(平樂鄕) || || '''{{{#white 생몰연도}}}''' ||664년 ~ 697년 5월 23일(만 33세) || [목차] == 개요 == 고구려의 [[사성정책|사성(賜姓)정책]]에 의한 왕족(王族) 출신 고구려 유민. 고구려가 망할 때 3살이었으며, 아버지 고질(高質)이 그와 다른 형제들을 데리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후 당의 이민족 장수로서 활약하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현존 사서엔 등장하지 않으나 묘지명이 남아 있어 후세에 알려질 수 있었다. == 계보 == 묘지명에는, 고자(高慈) 본인의 20대조부터 본인, 본인의 아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고자는 고구려 출신이니 스스로를 ''''[[조선인]](朝鮮人)''''이라고 출신을 적었다. 이 조선은 당연히 이성계의 조선이 아닌 [[고조선]]을 의미하며 [[연남산]] 또한 자신의 출신을 ''''[[요동]]조선인(遼東朝鮮人)''''으로 표현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전까지 '조선'은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과 주변 [[평안도]] 일대를 의미하는 지역명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자 가문이 통치했던 고구려의 백성을 ''''[[삼한]]인(三韓人)''''으로 적었다.[* 타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 중에는 출자를 요동삼한인(遼東三韓人)으로 표기한 것들도 있다.] 현대인들은 삼한이 한반도 중남부의 마진변한이란 걸 알고 있지만 이 마진변이 사라진 지 이미 수백년이 지난 삼국시대 후반부 당시에는 의미가 변형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셋을 삼한이라고 불렀기 때문.[*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한'도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이 아니라 한민족의 영역 전체를 의미하는 변형된 의미의 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의미 변화에 대해서는 [[삼한]] 문서 참조. 고자의 조상은 [[동명성왕|주몽왕]](朱蒙王)이 해동제이(海東諸夷)를 누르고 [[고구려|고려국]](高麗國)을 건국했을 때 그를 호종했다고 한다.[* 묘지명 원문 기록. 고구려가 고려로 표기된 건 이제는 흔히 알려져 있다시피 고구려 중기부터 몇 가지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있던 국호가 공식적으로 고려로 고정되었기 때문.] === 20대조 고밀(高密) === || '''{{{#white 작위}}}''' ||--왕(王)-- → '''후(侯)''' || || '''{{{#white 식읍}}}''' ||3000호(戶) || || '''{{{#white 성씨}}}''' ||? → 고(高) || || '''{{{#white 이름}}}''' ||밀(密) || || '''{{{#white 생몰연도}}}''' ||? ~ ? || 고자의 20대조 고밀(高密) 이전엔 고자 가문은 귀족이었지만 성씨가 없었거나 고씨가 아닌 다른 성씨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자 묘지명엔 후한 말, [[모용부|연모용]](燕慕容)과 벌어진 전쟁에서 고구려의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 혼자서 연군(燕軍)을 후퇴하게 만드니 당시 고구려의 임금이 밀에게 왕작을 하사하려 했다.[* 그런데 저 사건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선비족]] 모용부는 [[삼국시대(중국)]]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전연]]이 건국된 건 [[오호십육국시대]]인 337년으로 후한 멸망으로부터 한참 뒤다. 아마 고구려가 전연에 의해 수도도 함락당하며 거의 멸망할 뻔 했던 [[고국원왕]] 대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세 번 사양하고 거부하니 임금은 대신 고씨를 주고 [[후작]]에 봉해준 뒤, 금문철권(金文鐵券)을 주었다. >''''이제 영(令)하니, 고밀(高密)의 자손(子孫)은 대대(代代)로 봉후(封侯)될 것이다.''' > >'''오두(烏頭)[* [[까마귀]]의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압록(鴨綠)[* [[압록강]]을 의미.]이 마를 때까지 승습(承襲)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 > - 고자 묘지명 중 발췌. 고밀이 받은 금문철권에 쓰인 글귀다. 이 고밀이란 자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노자는 [[봉상왕]]대의 인물인데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외]]의 대대적인 침공에서 봉상왕을 구출한 뒤 모용선비를 두들겨 패고 다닌 기록이 있고 그 공로로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하사받았기 때문. 당시 중국의 왕조는 [[서진]]으로 연대상으로도 후한에 가깝긴 하다.[* 고노자의 생년을 240년 정도로 가정하면 고자와 420년 차이, 세대 당 평균 21세로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하지만 그외엔 다른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진 않다. === 고조부 고전(高前) === || '''{{{#white 관등}}}''' ||'''위두대형(位頭大兄)''' || || '''{{{#white 품계}}}''' ||3품(品) || || '''{{{#white 성씨}}}''' ||고(高) || || '''{{{#white 이름}}}''' ||전(前) || || '''{{{#white 생몰연도}}}''' ||? ~ ? || 3품 위두대형을 지냈다.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거의 위두대형을 지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특출난 인물이 아니라면 이 가문은 기본적으로 위두대형의 관등을 세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 증조부 고식(高式) === || '''{{{#white 관등}}}''' ||'''[[막리지]](莫離支)''' || || '''{{{#white 품계}}}''' ||2품(品) || || '''{{{#white 성씨}}}''' ||고(高) || || '''{{{#white 이름}}}''' ||식(式)[* 글자의 판독에 따라 무(武)로 해석되기도 한다.] || || '''{{{#white 생몰연도}}}''' ||? ~ ? || 2품 막리지를 지냈던 고위층 인물이었다. 묘지명엔 혼자서 국가와 정치를 관리했다는 것을 보아 강력한 권세를 누렸던 듯 하다. === 조부 고량(高量) === || '''{{{#white 관등}}}''' ||'''위두대형 겸 대상(位頭大兄 兼 大相)''' || || '''{{{#white 직위}}}''' ||책성도독(栅城都督) || || '''{{{#white 성씨}}}''' ||고(高) || || '''{{{#white 이름}}}''' ||양(量) || || '''{{{#white 생몰연도}}}''' ||? ~ ? || 3품 위두대형 겸 대상 관등을 가졌으며 책성도독을 지낸 고량은 고자의 할아버지다. 도독을 고구려 관직으로 치환하면 책성욕살에 해당한다.[* 이후 고구려 멸망 때 책성욕살로는 이타인(李他仁)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지방장관직의 경우 기록상 세습이 잦았다는 것에 비추어볼 때 고자 가문이 중앙정부로 스카웃되면서 책성 일대의 담당이 이타인 가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 부 고질(高質) === ||<-2> '''{{{#white 고구려의 배신자}}}''' || || '''{{{#white 국적}}}''' ||고구려 → '''당''' || || '''{{{#white 성씨}}}''' ||고(高) || || '''{{{#white 이름}}}''' ||질(質) || || '''{{{#white 자}}}''' ||성문(性文) || || '''{{{#white 사망지}}}''' ||당 마미성(磨米城) || || '''{{{#white 생몰연도}}}''' ||? ~ 697년 || ||<-2> '''{{{#white 고질의 고구려 관직}}}''' || || '''{{{#white 관등}}}''' ||위두대형(位頭大兄) || || '''{{{#white 직위}}}''' ||대장군(大將軍) || ||<-2> '''{{{#white 고질의 당 관직}}}''' || || '''{{{#white 작위}}}''' ||유성현 개국자(柳城縣 開國子)[br]유성현 개국공(柳城縣 開國公) || || '''{{{#white 직위}}}''' ||명위장군(明威將軍) 행우위위익부 좌랑장(行右威衛翊府 左郎將)[br]운휘장군(雲麾將軍) 행좌위위익부 중랑장(行左威衛翊府 中郎將)[br]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br]오교위위(五校威衛)[br]여하도 토격대사(濾河道 討擊大使) || 고질은 고구려에서 3품 위두대형 겸 대장군을 역임했다. 이전에는 이름이 문(文) 혹은 성문으로 알려졌으나 고질 본인의 묘지명이 발굴되며 자가 성문이고 본명은 질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후 고구려가 망할 것을 예상하고 형제와 아들들을 데리고 당에 항복한다. 그 대가로 고질은 자작에서 공작까지 봉해지고 수많은 직위를 얻으며 승승장구한다. [[이진충의 난]]을 시작으로 일어난 [[거란]]족 반란의 진압에 참여했는데 결국 아들 고자와 함께 697년 요동의 마미성(麻米城)에서 고립된 채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질 정도로 싸우다 포로로 잡혀 죽는다. === 본인 === ||<-2> '''{{{#white 밀의 당 관직}}}''' || || '''{{{#white 훈위}}}''' ||상주국(上主國) || || '''{{{#white 직위}}}''' ||우무위장상(右武衛長上)[br]유격장군의구장상(遊擊將軍依舊長上)[br]영원장군의구장상(寧遠將軍依舊長上)[br]정원장군(庭遠將軍)[br]장무장군(壯武將軍) 행좌표도위익부랑장(行左豹韜衛翊府郎將)[br]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br]좌옥옥검위장군(左玉玉鈐衛將軍)[* 사후 추증.] || 아버지의 투항 덕분에 어린 나이부터 관직에 올랐으며 무관(武官)이 되어 수 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다가 마미성 전투에서 패배, 적에게 항복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이 죽었다.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므로 가족이 있었지만 묘지명엔 아무 기록이 없다. 사실 고자 묘지명은 본인에 대한 기록이 전체 내용 중 절반 밖에 안된다. 다른 절반은 위의 조상에 대한 설명만 늘어 놓았다. 아마 젊어서 사망해 특기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듯. === 아들 고숭덕(高崇德) === 고숭덕은 고자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조정은 그 예우로 고숭덕에게 고자의 관직 좌표도위익부낭장(左豹韜衛翊府郞將)을 물려 주었다. 고자가 죽었을 때 고숭덕은 소학(小學)을 다니고 있었는데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64년 출생]][[분류:69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