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饒苗''' (? ~ 673년) [목차] == 개요 == [[고구려]]의 '''[[매국노]]'''. [[668년]] [[평양성 전투(668년)|평양성 전투]] 당시 [[승려]] [[신성(승려)|신성]], 소장(小將) 오사(烏沙) 등과 함께 [[연남건]]을 배반,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주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했다. 이후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9년]] 그의 묘지명이 공개되면서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백제]]에 [[예식진]]이 있다면 고구려엔 이 고요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고요묘 묘지명 == [[https://www.yna.co.kr/view/AKR20091021084300005|고구려 배신자 묘지명 중국에서 발견]] [[2007년]]에 중국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서안]]의 한 박물관에 짱박혀 있다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라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다. 이를 분석했더니 '고요묘'는 [[요동]] 출신에 창해([[발해만|발해]])를 건너 귀순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평양성 성문을 열고 항복한 '요묘'랑 행적이 비슷한데다 왕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성씨는 빼고 이름만 서술한 삼국사기의 특징, 그리고 '요'자를 성씨로 쓴 고구려인이 기록에 없다는 점에서 여기 고요묘랑 삼국사기의 요묘를 동일 인물로 본다. 성씨가 고씨고 당나라에서 좌령군원외장군(左領軍員外將軍)이란 직위를 받은 걸로 보아 고구려 귀족으로 추정되지만 왕족인지는 확실치 않다.[* [[고노자]], [[고자(고구려)|고자]]의 경우를 보면 알듯이 고씨가 왕성 이외에 사용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령군원외장군은 다름아닌 [[연남생]]이 당나라에 귀순하면서 받은 벼슬 바로 아래 품계였고, 당나라 황제를 곁에서 모셨다는 문구도 있어서 고구려 멸망의 공을 인정받았다고 본다. 고구려 멸망 후 5년만인 673년 11월 장안에서 갑자기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에는 "[[귀신]]들이 [[재앙]]을 내려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유민들에게 보복으로 암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공교롭게도 드라마 [[대조영]]에는 내부에서 평양성 성문을 열어 고구려 멸망에 일조한 고구려 장군 [[사부구]]가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과 고구려 백성들에게 맞아죽는 씬이 있다. 대조영은 2007년에 종영되었고 고요묘 비석은 2009년에 한국에 알려졌으니 우연의 일치겠지만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각주] [[분류:673년 사망]][[분류:고구려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