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ece5b6 '''{{{+1 당나라의 장군[br]밀운군공(密雲郡公)[br]{{{+1 高仙芝 | 고선지}}}}}}'''}}}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kosunji.jpg|width=100%]]}}} || ||<:> '''[[작위|{{{#ece5b6 작위}}}]]''' ||밀운군공(密雲郡公) || ||<:> '''{{{#ece5b6 성}}}''' ||고(高) || ||<:> '''{{{#ece5b6 이름}}}''' ||선지(仙芝) || ||<:> '''{{{#ece5b6 부친}}}''' ||[[고사계]](高舍雞) || ||<:> '''{{{#ece5b6 생몰년도}}}''' ||? ~ [[756년]][* [[연세대학교]] 사학과의 지배선 교수는 그의 출생연도를 700년 전후로 비정했다. 또한 [[연변대학]]의 방학봉 교수는 저서인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651869|중국 고대사에 이름을 남긴 조선 사람들]]》에서 고선지의 사망 당시의 연령을 40세 전후로 추산한 바 있다. 그러나, 아버지 고사계가 고구려 멸망 이전에 고구려 장수로 활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700년이나 그 이후 출생설을 받아들였을 때 고선지는 엄청난 늦둥이가 된다. ] || [목차] [clearfix] == 개요 == 高仙芝 ?~[[756년]] [[고구려]]계 [[당나라]] [[장군]].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서기 8세기 당나라의 [[중앙아시아]]([[서역]]) 정복을 진두지휘한 인물이었으며, 역사적인 [[탈라스 전투]] 당시 [[당나라군|당나라 원정군]]의 [[총사령관|총지휘관]]으로 알려져 있다. == 행적 == === 초기 생애 === [[고(성씨)|고(高)]]라는 [[성씨]] 때문에 고구려 계루부 고씨 [[왕족]]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으나 딱히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본래 고향은 [[중국]] [[하북]] 밀운군으로 [[베이징]] 근방이나, [[730년]]경의 [[튀르크]](돌궐) 전쟁 때 이주한 걸로 추측된다. 일찍이 [[장군]]이 되어 크고 작은 정복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당나라와 튀르크 사이의 전쟁을 진두 지휘했다. 당대의 [[당나라]]는 해외의 여러 나라 및 이민족들과 활발한 무역 및 상업 활동을 벌였다. 또한 당나라는 이른바 한화 선비족인 [[무천진 관롱집단]]이 건국한 [[중화제국]]이었다. 기미정책으로 [[도호부]]가 통치하던 부족이나, 무역을 하던 민족이 당나라 내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 군인들을 장군으로 기용하는 '''[[당나라군|번장제도]]'''가 있었다. 같은 시기에 [[고구려-당 전쟁|당나라]]와 [[신라]]의 [[나당연합군|연합군]]이 벌인 [[삼국통일전쟁|대규모 침공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고([[668년]]) 당나라에 전쟁포로로 끌려온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斯界)가 당나라의 번장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로로 [[왕모중]], [[왕사례]], [[이정기]]도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다. 이들은 여러 전쟁에 참전해 크게 전공을 세워 출세한 고구려 유민이었다.] 물론 이민자들만으로 군인을 보충하지는 않았다. 전쟁포로들도 [[포로]]로 잡히기 이전의 지위 고하에 따라 당나라의 관직을 주고 군인으로 삼았다. [[주필산 전투]]에서의 고구려군 전쟁포로들이 그랬으며 이후로도 고구려에서 전쟁포로로 끌려온 유민들이 서북 및 여러 지역에 정착하여 [[부병제]]의 부병이나, 단련병이라는 지역 방위군으로 활약했다. 고선지는 그러한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음서|음보]]를 통해 유격장군으로 등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서역]] 원정 === [[747년]]부터 [[토번 제국]]의 공격으로 당군이 후퇴했던 [[타림 분지]] 일대에 [[안서도호부]]를 다시 복구하는 과정에서 고선지가 여러차례 큰 전공을 올렸다. 이 와중 [[안서절도사]]였던 [[마영찰|부몽영찰]][* [[튀르기시]] 부족을 격파한 [[강족|서강족]] 출신의 당나라 [[무장]]. 나중에 [[마(성씨)|마씨]] 성을 하사받고, [[안사의 난]] 와중 참살당했다.]에게 >"개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啖狗腸高麗奴) 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고선지의 직책은 안서도호부 부도호 겸 안서사진[*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를 일컬어 '''안서 4진'''이라고 불렀다.] 도지병마사였는데 자신 바로 밑에 있는 고선지가 전공을 세워 바로 황제에게 보고를 하자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태는 감군으로 있었던 [[환관]] 변령성이 [[현종(당)|현종]]에게 서신을 보내 고선지로 하여금 안서절도사를 삼고, 부몽영찰을 [[하서절도사]]로 삼게 하며, 고선지가 부몽영찰을 이전과 같이 상관으로 대우하게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고선지는 이러한 전공으로 당시에 명성이 높아졌으며, [[747년]], '''[[파미르 산맥]]'''을 [[한니발|넘어]] 계빈(현 [[길기트]])를 정복하여 토번([[티베트]]) 세력을 쫓아내고, [[750년]], 재차 파미르 산맥을 넘어 [[토하리스탄]] 및 [[소그디아나]]의 [[서투르키스탄]]을 정벌하여 서역에 당제국의 권위를 확립하고 [[천하]]에 대당의 [[중흥]]을 알리는 대전공을 세웠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선지의 서역 정벌'''이다. 그러나 고선지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 === [[탈라스 전투]] === 750년, 고선지는 평화조약을 위반하고 [[기습]] 공격하여 석국(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정복하고 많은 군마와 재물을 [[약탈]]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먼저 [[항복]]하겠다고 한 석국을 [[개발살]]내버린 이런 행동은 서역 국가들의 공분을 일으켰고, 게다가 전쟁포로로 잡혀온 석국 [[국왕]] 차비쉬(차비시)를 당나라의 현종이 [[처형]]하자 당나라는 항복해도 죽인다는 식으로 인식되어 중앙아시아 제국의 여론이 나빠졌다. 그리고 희생자인 석국 국왕의 아들은 당나라에서 도망쳐 서역의 왕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때 [[중동]]을 거의 통일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바스 왕조|아바스 칼리파조]](흑의대식)는 중앙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을 [[이슬람]]화하고 [[무슬림]]의 영향권안에 넣을 절호의 기회라 보고, 당군과 싸우기 위해 중앙아시아로 진격했다. [[751년]], 고선지는 당나라에서 파견한 병력 및 동맹국의 병력들을 소집하여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일대에 있는 탈라스 대평원으로 진군하여 [[이슬람 제국]]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탈라스 전투'''인데 아무리 고선지의 당군이 강력하다해도 저 멀리 탈라스까지 긴 원정을 감행하게 되면서 매우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나마 동맹군이자 아군으로서 같이 따라오던 번병인 튀르크계 [[카를룩]]군마저 [[통수|중간에 배신을 하고 아바스군 쪽으로 붙는 바람에 순식간에 수적인 열세에 밀려 참패했다.]][* 양 측의 병력 규모 기록은 과장이 섞여있지만 공통적으로 아바스 왕조의 병력이 더 많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 패배로 인해 고선지는 하서절도사로 유임되었고, [[봉상청]][* 봉상청은 고선지가 발탁한 군인으로 절름발이라 태생적으로 군직을 맡기에 문제가 있었으나, 일찍이 발탁되어 그럭저럭 전쟁 실력을 인정받았고, 고선지가 혼자서 아바스군을 막기 위해 원정을 나간 탈라스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그 책임으로 물러난 이후 고선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안사의 대란 초기, 고선지군보다 먼저 안녹산의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되었으나 패배해서 퇴각했고, 이로 인해 감군 변영성의 모함을 받아 고선지보다 앞서 처형되었으며, 이어 고선지도 참수형을 당했다.]이 그의 후임 안서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비록 탈라스 전투는 당군이 패배했으나, 그 역사적 의의와는 달리 당대의 당 조정에서는 머나먼 변방의 전투였던 탈라스 전투의 패배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고선지는 큰 처벌을 받진 않았다. 이어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정복한 데 이어 서역의 여러 국가가 당현종에게 조공하고, [[서돌궐]] 10성 지역의 땅을 수복하는 등 서역에서의 당제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북송때의 《[[자치통감]]》에서는 서역에서의 당나라의 영향력이 여전했다고 기록했다. === [[안사의 난]]과 [[억울한 죽음]] === [[755년]] 동북 변경의 소그드-튀르크 혼혈 출신 번장 [[안록산]]이 [[안록산의 난]]을 일으키자 고선지는 [[부원수]]로 임명되어 당 조정의 관군을 지휘했다. 고선지는 [[안녹산]][* [[소그드]]계와 [[돌궐]]계 혼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인 '녹산'은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마사게타이]]족 [[부인]]이었던 [[록사나]]의 남성형을 한어로 음차한 것이었다.]의 반란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동관]](潼關)에서 안녹산군의 [[매복]] 공격을 피하기 위해 대기하다가 옛 동료 겸 감군이었던 변령성의 모함을 받아 참수당했다. 《[[신당서]]》(新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은 고선지와 봉상청의 최후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황제(현종)가 대노하여 변영성(邊令誠)에게 곧 군중(軍中)에서 베어 죽이도록 했다. 변영성은 봉상청을 베어 죽여 그 시체를 거친 대자리에 싸서 버렸다. 고선지가 다른 곳에서 도착하자 변영성은 도수(刀手) 100명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지시한 뒤 고선지에게 말하기를, [[즉결처형|"대부(大夫)에게도 역시 황명이 있다."]]고 했다. > >.....고선지가 이내 급히 내려가 말하기를, "내가 후퇴한 것은 죄를 지은 것이니 그 때문에 죽는다면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보고 창고의 식량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모함이다."라고 하고, 다시 변영성에게 이르기를, "위로 하늘이 있고, 아래로 땅이 있으며, [[삼군]](三軍)이 모두 여기 있는데, 어찌 임금께서는 이 일을 모르시는가?" 라고 했다. > >또 휘하의 사졸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모집했던 처음 의도는 적을 쳐부수고 나서 큰 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적(안녹산군)의 기세가 이 순간에도 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동관을 고수하게 되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너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너희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원통하다고 외쳐라!"라고 하자, 군중에서 모두가 '''"원통하다!"'''고 크게 외쳤는데 그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 >고선지가 봉상청의 시체를 보고, "그대는 내가 발탁했고, 또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그대와 더불어 죽으니 이는 모두 운명이 아니랴!"하면서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사실 고선지로서는 안녹산 군대의 서쪽 진군을 도저히 저지할 수 없어서 일단 섬주에서 나가 전략적인 위치로 퇴각하며, 적군에게 [[노획]]될 가능성이 있는 무기를 파묻고 창고를 직권으로 개방해서 군중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준 것이 죄라면 죄였다. 즉 임의로 상부의 명령없이 소개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져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관군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처형은 지나친 감이 있다. 고선지 이후 번장인 [[가서한]]이 당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동관에서 안녹산군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간신 [[양국충]]이 현종에게 독촉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라고 명령했다. 가서한은 고선지가 참수당한 사례를 떠올리고 어쩔 수 없이 18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군했으나 험준한 산악지형의 좁은 길목에 대군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안녹산의 부장이었던 최건우가 놓치지 않고 공격하면서 가서한은 대패하고 전쟁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쳐들어오는 [[연(안사의 난)|안록산의 연나라]]군한테 동도인 낙양,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 [[장안]]까지 함락되어 현종은 [[파천]]하다가 [[양귀비]]까지 잃고, [[사천성|검남도]]까지 도망친 후 반강제적으로 [[당숙종]]에게 양위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해버렸다. 이후 당나라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고선지의 전술적 판단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처형당한 셈이었다.[* 이후 고선지의 소개 명령에 반대해 상소를 올려 고선지를 처형토록 한 감군 환관 변영성은 수도 장안 동쪽에 있는 요지인 동관을 지키고 있다가 결국 안녹산의 반란군이 공격해오자 직접 동관을 바치고 투항했다. 변령성은 나중에 안록산의 난이 토벌된 뒤, 다시 관군 진영쪽으로 도망쳐왔다가 붙잡혀서 [[능지처참]]당했다.] == 평가 ==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서역을 정벌한 당나라 장군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 고선지가 한때 '[[중국 대륙]]에서 [[한민족]]의 기개를 떨친 민족영웅'으로 한국에서 주목받았던 것은 현재에는 상당히 비판받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이다. 고선지는 고구려 출신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구려부흥운동]] 등 [[고구려]], [[발해]] 및 당시 [[한국사]]와 별 관련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고, 그저 당 현종에게 충성한 당나라 장군으로써 당대 [[중국사]]에 더 밀접한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떠나서 고선지는 당시 당나라에서 역사적 자취를 남긴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충분한 위인이기는 하다. 《고등학교 [[세계사]]》의 경우, [[탈라스 전투]]가 중요하기 때문에 언급되는 군인이다. 다만 언급만 될 뿐 자세한 설명은 적혀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국사]]에서도 고선지는 고대 중국의 중앙아시아 경략의 최선봉으로써 연구대상이며, 고선지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간 탓에 조기에 [[토벌]]시킬 수도 있었던 [[안록산의 난]]을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치열한 [[안사의 난]]이라는, [[내전]]으로 더 장기화시켰다는 분석도 많다. 고선지의 원통한 최후로 파급된 안사의 난과 [[중당]] 이래 [[번진]] [[절도사]]들의 [[군웅할거]], [[오대십국]], [[북송]] 때까지 이어지는 [[난세]]를 [[나비효과|초래했다는 역사]]를 생각하면 의외로 비중이 적지 않은 인물인 셈이다. 고선지의 개인적인 행적만 보더라도, 당나라에서 [[영 좋지 않은]] 이민족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불후의 전공을 세워 출세했다가 억울한 최후를 당한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생애이기도 하다. == 기타 == 당나라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었던 시성 [[두보]]가 고선지 장군을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의 [[말(동물)|전투마(戰鬪馬)]]를 칭찬하는 시이다. 아마 [[군마]](軍馬)인 [[한혈마]]였던 듯하다. 장군 본인이 아니라, 말을 테마로 삼은 것은 주인의 지시와 뜻에 따라 충직하게 움직이며 때로는 목숨마저 같이 하는 것이 군인에게 있어 전투마인 것처럼, 황제와 황제가 휘하에 두고 있는 무장의 관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며, 대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사물을 통해 그 섬세한 깊은 면까지 묘사하는 시인의 기질이 적절히 발휘된 것으로 보여진다. 시 자체는 [[749년]]에 지어졌으나 이때 고선지는 현 [[신강 위구르 자치구|신강]] 지역까지 나가 정복전쟁중이었었고, 그 이전에 고선지가 별로 출세하지 못한 시점에서 두보가 그를 만났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의 마지막 구절로 볼 때 기약이 없는 고선지의 출세길을 한탄하면서, 역시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신세도 함께 한탄한 시이다. >安西都護胡靑驄(안서도호호청총): 안서도호의 서역산 푸른 준마 >聲價忽然來向東(성가홀연래향동): 명성을 떨치며 홀연히 동쪽으로 왔네 >此馬臨陣久無敵(차마임진구무적): 이 말은 전장에서 오래도록 무적이었고 >與人一心成大功(여인일심성대공): 주인과 한 마음으로 큰 공을 세웠네 >功成惠養隨所致(공성혜양수소치): 공을 이루니 은혜롭게 보살펴져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니 >飄飄遠自流沙至(표표원자류사지): 표표히 먼 사막으로부터 이르렀다네 >雄姿未受伏櫪恩(웅자미수복력은): 씩씩한 자태는 말구유에 엎드려 은혜입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猛氣猶思戰場利(맹기유사전장리): 사나운 기상은 아직도 전장의 승리를 생각하네 >腕促蹄高如踣鐵(완촉제고여부철): 발목 짧고 발굽은 높아 쇠를 딛고 서있는것 같으니 >交河幾蹴層氷裂(교하기축층빙렬): 교하에서 몇번이나 겹친 얼음을 발로 차서 깨트렸던가? >五花散作雲滿身(오화작산운만신): 오색 꽃무늬가 온 몸에 구름처럼 흩어져 있어 >萬里方看汗流血(만리방간한류혈): 10,000리를 달리면 바야흐로 [[아할 테케|피땀 흘리는 것]]을 보겠네 >長安壯兒不敢騎(장안장아불감기): 장안의 장사들도 감히 올라탈 엄두를 못내니 >走過掣電傾城知(주과철전경성지): 번개보다 빨리 달려감을 온 성에서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 >靑絲絡頭爲君老(청사락두위군로): 푸른 실로 갈기 땋고 주인을 위해 늙어가니 >何由却出橫門道(하유각출횡문도): 어찌하면 다시 전쟁터로 길을 나설수 있을까? >---- ><高都護驄馬行>(<고도호총마행>), [[두보]], 749년작. 지배선 교수가 [[이정기]]와 함께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인물이다. 한국에 나온 고선지 관련 서적은 전부 지배선의 저작이다. == 매체에서의 고선지 == <[[초롱이의 옛날여행]]>에 등장했다. KBS<[[역사스페셜]]>에서 2001년 신년 특집 2부작으로 다루었다. KBS 공사창립 특집 다큐멘터리 3부작 <[[고선지루트]]>가 방영되었다. 사극에서의 등장은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드라마)|대조영]]>에서 어린 소년 시절의 모습으로 잠깐 등장한 것이 유일하다. 동명천제단이 공중분해되고, [[이문]]에게 [[벤허|전쟁포로로 잡혀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에 압송되어 저잣거리에 묶여있는 대조영에게 물을 줬다가 당나라 장군에게 얻어 맞는다.]] 이때 아버지인 [[고사계]]가 나타나 당나라 장군들을 말리는 씬이 나온 후에 [[대조영]] 일행에게 인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선지를 드라마화하려는 계획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고, [[기황후]]보다 더 한국사와는 관계없는, 중국사와 관계가 더 깊은 위인이라 한국인 시청자들에게 생소할 당시 중국의 정세만을 자세히 다루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전쟁신도 많아 제작비도 많이 들고 [[양귀비]]와의 썸씽 같은 비역사적인 요소도 들어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중국 드라마 <[[양귀비비사]]>에서 [[이승현(1984)]]이 맡았다. 1980년대 대한자유총연맹에서 발간하던 잡지인 <어린이세계>[* 원래는 <어린이새농민>이라는 잡지였으나 1987년 농촌 인구 감소로 인해 농촌 색을 빼고, 어린이 반공잡지로 전향했다.]에 고선지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시대물이 연재된 적이 있는데, 무려 [[순정만화]]이다. 고선지는 [[흑발]] 미남, 그리고 변영성은 [[금발]] 미남으로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괴작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변영성이 고선지의 죽마고우로 설정되어 있고 봉상청은 고선지의 심복이며, 최종화에서는 우정을 발휘하여 용모가 더러운[* 흉터가 있는 [[자객]]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봉상청의 흉을 감추기 위해 봉상청과 고선지의 참수된 목에서 얼굴 [[가죽]]을 벗겨 [[해골]]로 만들어 효수하는 것으로 나온다. 1990년대 후반, [[중화민국]]에서 나온 한 시뮬레이션 게임에 나오는데 능력은 좋으나 난폭하여 결국 이로 인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죽는다고 나왔다.(《V챔프》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기사에서 나오던 게임이었음) [[윤승운]] 화백이 그의 일대기를 만화화한 적이 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756년 사망]][[분류:베이징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우즈베키스탄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