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고규주}}}'''[br]'''高圭柱[* 高'''{{{+1 奎}}}'''柱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 || '''자 / 호''' ||이천(二千) / 석봉(石峰) || || '''본관''' ||[[제주 고씨]][* 장흥백파-효열공파(孝烈公派) 30세 주(柱) 항렬.] || ||<|2> '''출생''' ||[[1894년]] [[11월 15일]] || ||[[경상도]] [[진해구|진해현]] 서면 일암리[br](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 ||<|2> '''사망''' ||[[1980년]] [[11월 15일]] || ||[[경상남도]] [[창원시|창원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65호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11대손이며, [[고경명]]의 장남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효열공(孝烈公) 고종후(高從厚)의 10대손이다. 독립유공자 [[고앙주]]는 그의 남동생이다. == 생애 == 1897년 11월 24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일암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에서 아버지 고제칠(高濟七, 1855 ~ ?. 10 .1)과 어머니 [[변(성씨)|초계 변씨]](草溪 卞氏, ? ~ ?. 5. 26) 변덕윤(卞德潤)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목]]에 세거해왔으나, 6대조 고한창(高漢昌)이 동생 고한현(高漢賢)·고한일(高漢日)과 함께 10대조 고종후(高從厚)[*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으로 참전했다가 순절하였다. 그래서 묘소가 진주에 있었던 것이다.]의 묘소가 있던 [[경상도]] [[진주시|진주목]] 양전면 발산리(현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로 이주해왔고, 뒤에 고한창이 재차 진해현 서면 일암리로 이주해와서 7대째 세거하게 되었다.[* 첫째 남동생 고한현은 이때 거제현(현 [[거제시]])으로 이주했고, 둘째 남동생 고한일은 진주목(현 진주시) 문산면으로 이주했다.] 그는 1920년대 초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1919년 창원 지역의 [[3.1 운동]] 당시 동생 [[고앙주]]가 일본군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한 것이 그의 결심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포섭한 뒤 1922년 4월 [[하와이]]에서 결성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과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같은 달 22일 권총을 휴대하고 [[동래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 등을 전전하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이후 1980년 11월 15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별세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5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주 고씨 장흥백파]][[분류:마산합포구 출신 인물]][[분류:1894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