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고광순}}}'''[br]'''高光洵[* 문헌에 따라 高光'''{{{+1 珣}}}''', 高光'''{{{+1 詢}}}'''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광순.jpg|width=100%]]}}} || || '''초명''' ||고광욱(高光旭) || || '''자 / 호''' ||서백(瑞伯) / 녹천(鹿川 또는 鹿泉) || || '''본관''' ||[[제주 고씨]][* 장흥백파-의열공파(毅烈公派)-진위공파(振威公派) 22세 광(光) 항렬. 본래 의열공파-유계공파(柳溪公派) 후손이었다.] || ||<|2> '''출생''' ||[[1848년]] [[2월 7일]] || ||[[전라도]] [[담양군|창평현]] 현내면 유천리[br](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인근의 삼천리·용수리와 함께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광문]]·고광채·고광훈·고제량·[[고홍석]]과 [[고영한]] 전 대법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http://www.chkorea.news/news/articleView.html?idxno=745|#]]] || ||<|2> '''사망''' ||[[1907년]] [[10월 16일]][* 음력 9월 10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9월 14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향년 59세)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67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고광훈은 그의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기산도는 그의 사위이다. == 생애 == 1848년([[헌종(조선)|헌종]] 14) 2월 7일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아버지 고정상(高鼎相, 1819 ~ 1872. 7. 25)[* 족보명 고정주(高鼎柱).]과 어머니 [[광산 김씨]](1817 ~ 1879. 8. 19)[* 김경섭(金京燮)의 딸이다.]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딸만 셋 있던 21촌 지간의 족숙(族叔) 고경주(高慶柱, 1826 ~ 1858. 9. 16)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12대손이자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高因厚, 1561 ~ 1592. 7. 10)의 11대 봉사손(奉祀孫)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는 상소를 한 후 기우만과 함께 [[을미의병|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관군에 의해 해산당한다. 후에 [[최익현]]의 의병 세력에 가담하려했으나 최익현의 의병들이 해산당하자 본인이 의병장이 되어 다시금 창의하는데, 조상인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킬 당시의 나이와 같은 60세의 일이었다. 1907년 2월 12일, 고광순은 [[남원시|남원도호부]] 향리 출신의 의병장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성을 장악하기로 하고,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했다. 이때 모인 인원은 40명이었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으며, 부장엔 고제량[* 20촌 지간의 족조(族祖)이다.], 선봉장에 고광덕, 좌익장 고광훈[* 생가 쪽 친동생이다. 입양된 뒤로는 22촌 지간으로 멀어졌다.], 우익장 고광채[* 18촌 지간의 족제(族弟)이다.], 참모 박기덕(朴基德), 호군에 윤영기(尹永淇), 종사에 신덕균과 조동규(曺東圭)가 임명되었다. 당시 구례의 천재 매천 [[황현]]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하나 써달라 청하나 거절당한다. 그 후 지리산 일대에서 투쟁하다가 구례 연곡사에서 일제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다. 일제는 연곡사 뿐 아니라 근처의 절도 모두 태워버렸다. 매천 황현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과 무덤을 만들고 후일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비를 세운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제주 고씨 장흥백파]][[분류:담양군 출신 인물]][[분류:1848년 출생]][[분류:190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