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dbscthumb.phinf.naver.net/e0d5cfdf-ca0d-42.jpg?type=m250_fst_nce&wm=Y.jpg]] 桂貞植 [[1904년]] [[10월 26일]][* 음력 9월 18일.] ~ [[1974년]] [[10월 3일]] [목차] == 소개 == [[한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지휘자이자 [[작곡가]]. 본관은 [[수안 계씨|수안]](遂安)[* 평양파 22세.]. == 생애 == [[1904년]] [[10월 26일]] [[평안남도]] [[평양부]][* 현 [[북한]] [[평양시]]]에서 [[기독교]] [[목사]]인 아버지 계택선(桂澤宣)과 어머니 송행선(宋行善)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서 처음 [[바이올린]]을 접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를 졸업했다. 다시 [[독일]]로 가서 뷔르츠부르크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한국고전음악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을 역임하고 고려심포니 및 서울심포니 창립·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우익 계열 음악인의 대표격인 [[현제명]]이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자 참여하여 창립음악회의 지휘자를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은 군정장관 아서 러치가 명예회장을 맡았을 만큼 [[미군정]]과 가까운 관계였다. 1945년 이영세를 위원장으로 여러 계열이 연합해 조직한 조선음악가협회 이사를 지냈고, [[1944년]]에 [[동성고등학교#s-8|동성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1946년]]에는 대한연주가협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에서는 [[1946년]] 탈퇴한 뒤 김생려 등 탈퇴파들과 함께 서울관현악단(서울교향악단의 전신)을 조직하여 미군 부대를 근거로 활동을 했다. [[1956년]] [[7월 24일]] 한국음악단체연합회(韓國音樂團體聯合會) 창립 대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57년]] 설립한 아카데미3중주단의 멤버였다. [[1957년]] 5월 김종명(첼로)·김동성(피아노)과 함께 아카데미3중주단의 창단연주회를 개최했으며, [[5월 17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제3회 연주회 때 출연했고, [[5월 18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첫 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았으며, [[1974년]] [[10월 3일]] [[뉴욕 주]] 앰허스트 시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100500239105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4-10-05&officeId=00023&pageNo=5&printNo=16463&publishType=00010|#]] ==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해 열린 조선음악경연대회에 양금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대화숙 안에 설치된 경성음악연구원에서 강의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1941년]] 총독부가 지휘해 결성된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도 이사로 참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수안 계씨]][[분류:1904년 출생]][[분류:1974년 사망]][[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