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3> {{{#gold '''조선 성종의 왕자'''[br]{{{+1 '''계성군 | 桂城君'''}}}}}} || ||<-2> '''[[봉호|{{{#gold 봉호}}}]]''' ||계성군(桂城君)[* 봉호는 [[경상도]] [[창녕군|창녕]]에 있었던 옛 고을인 '계성(현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에서 따왔다.] || ||<-2> '''[[본관|{{{#gold 본관}}}]]''' ||[[전주 이씨]] || ||<-2> '''[[이름|{{{#gold 이름}}}]]''' ||순(恂) || ||<-2> '''[[자(이름)|{{{#gold 자}}}]]''' ||수견(壽堅) || ||<-2> '''{{{#gold 부왕}}}''' ||[[성종(조선)|성종]] || ||<-2> '''{{{#gold 생모}}}''' ||숙의 하씨 || ||<-2> '''{{{#gold 부인}}}''' ||안성군부인 [[원주 원씨]] (安城郡夫人 原州 元氏) || ||<-2> '''{{{#gold 자녀}}}''' ||'''슬하 1녀 [[양자(가족)|1남]]''' 서장녀 - 이수철(李壽鐵) 양자 - 계림군 이유(桂林君 李瑠) || ||<-2> '''{{{#gold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 ||<|2> '''{{{#gold 생몰[br]기간}}}''' || '''[[음력|{{{#gold 음력}}}]]''' ||[[1478년]] [[미상]] ~ [[1504년]] [[미상]] || || '''[[태양력|{{{#gold 양력}}}]]''' ||[[1478년]] [[미상]] ~ [[1504년]] [[미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왕족. [[성종(조선)|성종]]의 2남이자 서장자이다. 어머니는 숙의 하씨이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성인이 돼서는 행실이 좋지 못하였다. 26세로 조졸하였고 친형제는 없으며 [[전주 이씨|전주이씨]] 계성군파의 파시조이다.[* 전주이씨 계성군파 후손들은 종통으로는 계성군파이지만 실제 혈통으로는 [[성종(조선)|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직계 후손들이다.] == 행실 == 계성군은 성품이 거만하고 포악했으며 시중잡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의 종들이 유생들을 함부로 구타하고, 형조의 하인들을 집안에 가두기도 했다. 이일로 조정이 시끄러웠으나 [[연산군]]이 그를 총애하여 벌주지 않았다. 또한 여색을 밝혀 궁궐에 머물던 기생(흥청)들과 자주 어울리며 가까이 하기도 했다. 계성군이 종실의 기강을 잡는 종부시 제조였을 때 그의 옳지 못한 행실이 문제가 되어 여러번 탄핵 당했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계성군을 비호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속 계성군의 행실을 이르자면, >전교하기를, >"가흥청(假興淸) 일소류(一笑留)가 계성군(桂城君)과 간통[通奸]한 일을 곧 승복(承服)하지 않다가 형세가 숨길 수 없게 되어서야 스스로 고하였으니, 가두고 국문(鞫問)하라." 하였다. >----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5월 7일 신묘 3번째기사 >대사헌 민휘(閔暉)는 아뢰기를, >"종부시(宗簿寺)는 종친(宗親)들을 규찰하는 곳인데,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어찌 아랫사람들을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계성군(桂城君) 순(恂)은 법을 범한 일이 매우 많으므로, 본시(本寺)의 제조(提調)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바꾸기를 청합니다." >----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2월 12일 경술 1번째기사 >대사간 민휘(閔暉)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계성군이 형조(刑曹)의 하인을 함부로 가두었으므로, 신 등이 국문하기를 청했는데, 전하께서 종친(宗親)이라 하여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국문을 못하도록 명령하시므로, 신이 감히 다시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종부시는 종친들을 통솔하여 다스리는 곳인데 이순(李恂)은 제조에 아주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2월 13일 신해 3번째기사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이 삭제(朔祭)의 헌관(獻官)으로서 병을 핑계하고 향축(香祝)을 받지 않으니, 왕이 이르기를, "계성군의 병이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도 향(香)을 받지 않으니 심히 불가하다. 물건에 비유한다면, 무릇 나무는 반드시 북돋우고 가꾸어 주어야만 잘 자라는 법인데, 계성군에게 붙어 있는 자들은 모두 교만하고 어리석은 종들뿐이니, 누가 그 옳지 않은 것을 바로잡으랴. 그러나 병이 있다고 말하므로 국문할 수도 없으니, 버려두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도록 하라." 하였다. >---- >연산군일기 12권, 연산 2년 1월 2일 신사 1번째기사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이 까닭 없이 취학(就學)하지 않으므로, 직장(直長) 이분(李芬)이 그 집에 가서 물으니, 순(恂)이 관대(冠帶)를 벗은 채 신발만 신고 거만스럽게 나와 보았다는데, 이분이 연유를 갖추어 계(啓)하였습니다." 하였다. >승지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소문(召問)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묻게 하신 것은 존대하시는 때문이니, 순이 마땅히 관대(冠帶)하고 나와 맞아야 할 터인데, 소홀하고 거만하여 이처럼 불공하니, 신하된 예가 없습니다. 문책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친히 묻겠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13권, 연산 2년 3월 24일 임인 3번째기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성종(成宗, 1457~1494) * 어머니 : 숙의 하씨(淑儀 河氏) * 정부인: 안성군부인 [[원주 원씨]](安城郡夫人 原州 元氏, ? ~ 1535) - 원치(元菑)의 딸 * 양자 : 계림군 이유(桂林君 李瑠, 1502~1545) - [[월산대군]]의 손자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장녀 : 이수철(李壽鐵, 1502 ~ ?) - [[창녕 조씨|조인각]](曺仁角)의 처 * 외손자 : 조계우(曺繼虞, 1521 ~ ?) * 외손자 : 조계하(曺繼夏, 1526 ~ ?) * 외손자 : 조계은(曺繼殷, 1535 ~ ?) * 외손자 : 조계주(曺繼周, 1542 ~ ?) === 후손 === 첨정 원치의 딸 안성군부인 [[원주 원씨]]와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첩에게서 딸 1명을 얻었다. 하여 사후에 [[성종(조선)|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둘째 손자인 계림군 이유(桂林君 李瑠)를 [[양자(가족)|양자]]로 들였다. 계림군은 [[중종(조선)|중종]] 시기 정치적으로 대윤(大尹) 세력에 속했으며 [[을사사화]] 때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모함을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계림군은 슬하에 연양군, 금양수, 운양수, 정양군, 은양군 등 5남을 두었는데 위로 세아들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아래 정양군과 은양군 두아들에게서 손자를 10여 명을 두어 후손들이 퍼져나갔다. 대대적으로 무과 급제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림군]]파, [[덕흥대원군]]파와 더불어 [[전주 이씨]] 문중의 3대 무관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정양군의 후손은 [[제주도]]에 은양군의 후손은 [[경기도]] [[고양시]]에 다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계성군파를 이루고 있다. 종통상으로는 계림군이 후사가 없는 계성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계성군파라고 불리나 실제 혈통으로는 [[성종(조선)|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직계 후손들이다. 이 때문에 매년 [[월산대군]]의 기신제에 참석하며 [[의경세자]](덕종)와 [[소혜왕후|인수대비]](소혜왕후)의 [[경릉]] 제향때 계성군파 후손이 종헌관을 맡기도 한다. [[분류:서출]][[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1478년 출생]][[분류:1504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계성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