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3> {{{#ffd700 {{{+1 '''경희궁 광명전'''}}}[br]{{{-1 慶熙宮 光明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희궁1가길,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1 (추정)}}} || ||<-2> {{{#ffd700 '''건축시기'''}}} || [[1617년]] ~ [[1620년]] 사이 {{{-1 (창건)}}} / 철훼시기 미상 {{{-1 ([[1868년]] 이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희궁]]에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 이름 == '광명(光明)' 뜻은 '밝은(明) 빛(光)' 또는 '밝게(明) 빛난다(光)'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로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 [[덕수궁 광명문|광명문(光明門)]]이 있다. == 용도 ==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주로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열었던 격 높은 건물이었던 듯 하다. [[http://sjw.history.go.kr/id/SJW-G06060130-02600|1782년(정조 6년) 6월 13일 자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대내(大內)의 크게 이름난 전각'이라 했으며 [[http://sjw.history.go.kr/id/SJW-G07010120-04400|1783년(정조 7년) 1월 12일 자 기사]]에는 내정전(內正殿), 즉 내전에서 가장 으뜸가는 전각이라 했다. [[http://sjw.history.go.kr/id/SJW-G07070170-00400|6개월 뒤 기사]]에서는 조하를 받는 대내의 정전으로 [[창덕궁 인정전|인정전]][* [[창덕궁]]의 [[정전(동음이의어)#s-3|정전]].], [[창경궁 명정전|명정전]][* [[창경궁]]의 정전.]과 비슷하며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정조(조선)|정조]]의 작품들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에 수록된 〈경희궁지〉에는 내전에서 하연을 받는 곳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곳을 빈전과 동뢰연[* 同牢宴. 가례 때 [[신랑]]과 [[신부]]가 교배례를 마친 뒤 술잔을 나누고 음식을 먹던 연회.] 및 기타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는 기사가 있다. 빈전으로 쓴 때는 [[인목왕후]]와[[http://sillok.history.go.kr/id/kpa_11007001_001|#]] [[선의왕후 어씨|선의왕후]]의 국상 때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6029_001|#]], 동뢰연 장소로 활용한 때는 [[숙종(조선)|숙종]] - [[인원왕후]], [[경종(조선)|경종]] - [[선의왕후 어씨|선의왕후]][[http://sillok.history.go.kr/id/ksa_14408102_002|#]], [[효명세자|문조(효명세자)]] -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http://sillok.history.go.kr/id/kwa_11910013_003|#]], [[헌종(조선)|헌종]] - [[효정왕후]]의[[http://sillok.history.go.kr/id/kxa_11010021_002|#]] [[결혼|가례]] 때였다. 이밖에도 [[현종(조선)|현종]] 때 [[대왕대비]]였던 [[인조]] 비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추가해 올리는 의식을 여기서 열었고[[http://sjw.history.go.kr/id/SJW-C02070220-01100|#]], [[영조]] 때는 [[영희전]]에 있던 [[세조(조선)|세조]] [[어진]]을[[http://sillok.history.go.kr/id/kua_11108027_001|#]], [[헌종(조선)|헌종]] 때는 준원전[* 濬源殿.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에 있던 [[태조(조선)|태조]] 어진을 광명전으로 옮겨와 베껴 그렸다.[[http://sjw.history.go.kr/id/SJW-I03120070-00700|#]] 《궁궐지》 - 〈광명전조 - 광명전기〉에는 [[숙종(조선)|숙종]]과 영조가 이곳에서 크고 작은 연회를 여러 번 열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4%91%EB%AA%85%EC%A0%84(%E5%85%89%E6%98%8E%E6%AE%BF)|#]] 1836년(헌종 2년)에 [[종묘]]를 넓혀지을 때에는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이 곳과 [[경희궁 장락전|장락전]]에 나누어 모셨다.[[http://sillok.history.go.kr/id/kxa_10201010_001|#]] == 역사 ==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었다. 이후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했다. 1727년([[영조]] 3년) 3월에[* 음력 2월.] 부속 건물 첨선당에서 불이 났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ua_10302014_003|#]] 광명전은 무사했다. 그러나 [[정조(조선)|정조]] 초반에 건물이 무너져 고쳐지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4%91%EB%AA%85%EC%A0%84(%E5%85%89%E6%98%8E%E6%AE%BF)|#]] [[고종(대한제국)|고종]] 재위 초반인 [[1860년대]] 후반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경희궁 흥정당|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다만, 1868년([[고종(대한제국)|고종]] 5년)에 광명전 동쪽 [[담|담장]]이 무너져 수축할 것을 [[경희궁]] 입직 위장 박진예가 아뢴 [[http://sjw.history.go.kr/id/SJW-K05060050-02000|《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저 때 까지는 남아있었던 듯 하다. == 여담 == * [[숙종(조선)|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가 광명전에 있었을 때, 작은 [[뱀]]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에 또아리를 친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궁인들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명성왕후는 "이곳은 산이랑 가까우니 뱀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해칠 필요 없다."며 궁인들을 안심시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지 말라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912028_002|#]]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희궁 장락전, version=37, paragraph=2)] [[분류:경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