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기념물|{{{#ffffff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 || 34호 ||<|2> ← || '''35호''' ||<|2> → || 36호 || || [[의령옹주#s-3|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ffffff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5호}}}''' || ||<-2> {{{#fff {{{+1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br]{{{-1 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 '''{{{#fff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fff 수량 / 면적}}}''' || 석물 1基, 토지 0.2㎡ || || '''{{{#fff 지정연도}}}''' || [[2014년]] [[2월 20일]] || || '''{{{#fff 소유자[br](소유단체)}}}''' || 국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천군_이해룡_사패지_송금비_(촬영년도___2015년).jpg|width=100%]]}}} || || '''{{{#F0AD73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524951&ccbaKdcd=23&ccbaAsno=0035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송금비이다. == 상세 == === 이해룡 === 이해룡은 [[조선]] [[선조(조선)|선조]], [[광해군]] 시기의 관료로, [[자(이름)|자]]는 해수(海叟), [[아호|호]]는 북악(北嶽)이다. 1546년([[명종(조선)|명종]] 1년)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 11년)에 사망했다. [[봉호]]가 있는데다 성씨가 [[이(성씨)|이씨]]라 왕족 출신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본관]]이 [[경주 이씨|경주]]라서 [[종친]]은 아니었다. 그가 봉군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에 [[외교]] 부문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명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일본]]과의 강화 교섭에서 사신 접대 및 정세 파악하는 일을 담당했다. [[역관]]이었던 그는 임진왜란 전에도 [[통신사]]를 수행하러 일본에 갔을 때, [[왜구]]들에게 포로로 잡혔던 조선인을 구해오는 등 공이 많았던 관료였다. 또한, 명필이었다고 한다. [[창덕궁]]의 정전 정문인 [[창덕궁 인정문|인정문]]의 [[현판]] 글씨를 썼다고 전해지며, 통신사 수행 역관일 때 [[대마도]]에서 승려 겐소의 부탁으로 절의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또한 [[교토시|교토]]에 갔을 때는 너도나도 이해룡의 글씨를 받으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재주 역시 외교 활동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술한 행적들을 인정받아 경천군(慶川君)으로 봉해졌고, 최종적으로는 내섬시주부 직을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1614년([[광해군]] 6년) 음력 10월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번지 일대를 사패지로 받았다. 사패지는 공을 세운 신하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토지를 말한다. 바로 이 사패지 내의 [[소나무]]를 베지 말라고 세운 비석이 본 문서에서 다루는 사패지 송금비이다. === 송금비 === 송금비(松禁碑)는 [[소나무]](松)를 무단으로 베지 못하도록(禁) 세운 [[비석]]이다.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는 임의의 [[산]]이나 [[숲]]을 지정하고 그곳에서는 [[나무]]를 베지 못하게 막는 제도를 시행했었다. 전근대 시절에는 목재가 없어서는 안될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런데 너도 나도 벌목을 많이 하게 방치하면 삼림자원이 빨리 고갈되기 쉬웠다. 그래서 이를 막고, 토목 공사 등 나라에서 목재가 필요할 때 이를 문제없이 수급하기 위해 송금 제도를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비석이 송금비이다. [[비석]]은,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형태이나 윗부분만 둥근 모습으로 되어있다. 전면에는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경천군 사패정계내 송금물침비)" 란 글씨가 새겨져있다. 해석하면, "경천군에게 내려준 땅 경계 안에 있는 소나무를 벨 수 없으니 들어가지 말라"란 뜻이다. [[조선시대]]의 송금비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비석이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2월 20일에는 [[서울특별시의 기념물|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받았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경천군_이해룡_사패지_송금비|한국어 위키백과: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408316&cid=40942&categoryId=33383|두산백과: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5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350000,11&pageNo=1_1_2_0|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후 일본과의 화평 교섭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여 경천군으로 봉해진 이해룡(李海龍)에게 1614년 광해군이 하사한 토지의 경계 지역 내의 소나무를 무단으로 침범 혹은 벌목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 >송금(松禁)이란 역사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소나무의 생장에 적당한 곳을 선정하여 보호하고 벌목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어 조선시대에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의 제도가 있어서 소나무숲의 벌목이 엄하게 다스려졌다. > >이 송금비는 그동안 문헌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임업 정책의 실례를 방증하는 유물로서, 이 비를 통해 조선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관되게 시행된, 오늘날의 자연환경 보존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송금 정책의 일면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송금비는 모두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이 비가 송금비로서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임업사에서 중요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2기가 확인된 바 있으나, 현재 2기 중 1기는 소재 확인 중에 있으며 우선 남아 있는 1기부터 서울특별시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한다. [[분류:서울특별시의 기념물]][[분류:은평구]][[분류:조선의 금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