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경복궁 향원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한국의 정원)]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1601~18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1760호 ||<|2> ← || '''1761호''' ||<|2> → || 1762호 || || [[경복궁 수정전]] || '''경복궁 향원정''' || [[창덕궁 금천교]] ||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1761호}}}]]''' || ||<-2> {{{#fff {{{+1 '''경복궁 향원정'''}}}[br]{{{-1 景福宮 香遠亭}}}}}}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경복궁 향원정,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2012년 3월 2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향원정.png|width=100%]]}}} || || {{{#gold ''' 향원정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정원|후원]]에 있는 [[정자(건축물)|정자]]이다. 위치는 건청궁의 바로 남쪽, [[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함화당과 집경당]]의 북쪽에 있다. == 이름과 현판 == '향원(香遠)' 뜻은 '향기(香)가 멀리(遠) 간다'로, [[북송]] 시기 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香遠益淸)'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향원정 현판.png|width=100%]]}}} || || {{{#gold '''향원정 현판'''[*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2281897&ccbaKdcd=12&ccbaAsno=176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현판]] 글씨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직접 썼다. 20세기 초반까지는 흰 바탕에 짙은 글씨였으나 어느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2016년에 [[문화재청]]에서는 향원정을 비롯해 색상이 바뀐 현판을 조사하여 조선시대 원형으로 복원하겠다고 밝혔고, 후술할 2017년 ~ 2021년에 보수 공사를 진행할 때 복원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60513046700005|#]] == 역사 == [[조선시대|조선 초기]]에는 없었다. 1456년([[세조(조선)|세조]] 2년)에 [[경복궁]] [[정원|후원]]에 지은 취로정(翠露亭)이 향원정 자리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 향원정은 경복궁 중건 이후에 처음 세운 것이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한때 1873년([[고종(대한제국)|고종]] 10년)에 [[경복궁 건청궁|건청궁]]과 같이 건립했다는 설이 유력했었다. 그러나 하술할 2017년 ~ 2021년 보수 공사 때 [[문화재청]]에서 목재 연륜 연대 조사를 통해 1881년(고종 18년)과 1884년(고종 21년) 두 번에 걸쳐 벌채한 목재를 사용한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현재는 건립 시기를 1885년(고종 22년) 안팎으로 추정한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1105500172&wlog_tag3=daum|#]] 이후 [[왕]]과 [[왕족|왕실 가족]]들이 휴식처로 활용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무사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일부 변형된 부분이 있기도 했다. 건물 구조의 특징에 대해서는 [[https://blog.naver.com/hanmun2014/220888903976|링크]]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752_yGwiuw)]}}} || || {{{#gold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향원정 복원 수리 현장 영상'''}}} ||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건물이 노후화 되었기 때문에 [[문화재청]]에서 2012년부터 정밀실측조사에 들어갔고 2015년까지 매년 안전점검을 진행했다. 조사 결과 기둥을 받치는 주초석 일부가 침하되면서 건물 전체는 물론, 수장재[* 건물의 내, 외부를 아름답게 꾸미는 재료.] 역시 기울어지고 뒤틀린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2017년 5월부터 2021년 9월까지 전면 해체 보수 공사를 진행했고, 고종 시기와 달라진 부분은 원형대로 복원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d_V_CRIv4w)]}}} || || {{{#gold '''향원정 온돌 발견 내용을 다룬 2019년 11월 20일 자 YTN 뉴스'''}}} || 해체 수리 중이던 2019년 11월에 향원정 바닥에서 [[온돌]] 시설이 발견되었다.[[https://www.ytn.co.kr/_ln/0106_201911201517076199|#]] 비록 가장자리에만 설치되었지만, [[정자(건축물)|정자]]에 온돌이 있는 보기 드문 경우라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xWg3yJmH90)]}}} || || {{{#gold '''향원정 복원, 보수 공사 완료 및 공개를 다룬 2021년 11월 5일 자 KBS 뉴스 '''}}} || 보수 공사를 모두 마치는 2021년 10월 20일에 다시 일반에 개방할 예정이었으나 11월 초순으로 연기됐다.[* 다만 펜스는 10월 말에 이미 모두 걷어내었다.] 이후 11월 5일에 전면 개방했다. 취향교 출입 및 전각 근접 관람은 2022년 4월부터 가능해졌다. == 향원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향원지.png|width=100%]]}}} || || {{{#gold '''향원지'''[*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5025&ccbaKdcd=12&ccbaAsno=176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1 景福宮 香遠池}}} 향원정의 [[연못]]이다. 역사는 향원정과 같다.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 사각형으로 지었으나 가장자리 부분만 둥글게 마무리 했다.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고 그 위에 향원정 건물이 들어서있다. 현재는 [[잉어]]가 살고 있는 듯하다.[* 가끔 향원지 물 위에 떠있는 녹조류들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넓이 5,438㎡로, [[수심]]은 평균 0.7m, 제일 깊은 곳은 1.1m이다.[[https://www.lak.co.kr/m/ecoscape/view.php?cid=63091&id=254|#]] 1894년 향원지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피겨 스케이팅]]을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시연했다. == 취향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취향교.png|width=100%]]}}} || || {{{#gold '''취향교'''}}} || {{{+1 景福宮 醉香橋}}} 향원정을 건너는 [[교량|다리]]이다. 향원정을 지을 때 같이 세웠으며 향원정의 북쪽, 그러니까 건청궁 쪽 방향에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베베르 취향교.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위에서 바라본 취향교.png|width=100%]]}}} || ||<-2> {{{#gold '''조선 말에 촬영한 향원정과 취향교.[br]왼쪽은 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가 촬영한 사진이고, 오른쪽은 아놀드.H의 편지에서 채록한 사진이다.'''}}}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궁-00788-0001_1.jpg|width=100%]]}}} || ||<-2> {{{#gold ''' 일제강점기 초 취향교 모습을 담은 엽서[* [[http://www.gogung.go.kr/imgView.do?title=%25EA%25B2%25BD%25EB%25B3%25B5%25EA%25B6%2581%2520%25ED%2596%25A5%25EC%259B%2590%25EC%25A0%2595%2520%25EC%2582%25AC%25EC%25A7%2584%25EC%2597%25BD%25EC%2584%259C&cultureSeq=00019428MB&imgSeq=2|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유리건판 취향교1.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고적도보 향원정3.png|width=100%]]}}} || || {{{#gold ''' 유리건판에 촬영한 취향교 사진 '''}}} || {{{#gold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취향교 사진. 다리가 일자로 바뀌었다. '''}}} || 원래는 [[무지개]] 모양의 나무로 만든 흰색 다리였으며 [[일제강점기]] 즈음에 일자 형태로 바뀌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향원정 복원 전.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unggu.com/gyeongbokgung6_2.jpg|width=100%]]}}} || ||<-2> {{{#gold '''2007년[* 뒤에 보이는 건청궁은 2007년에 [[복원]]되었다.] ~ 2017년의 향원정과 취향교 모습. 전면에 보이는 다리가 6.25 전쟁 이후 새로 지은 취향교이다.[* [[http://www.heritage.go.kr/heritage/heritage_pop/detailImgPop.jsp?gung_number=1&file_name=ic-k1.jpg|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6.25 전쟁]] 때 파괴당했던 것을 1953년에 [[복원]]했는데 관람 편의 등의 이유로 기존 자리가 아닌 남쪽에 세웠다. 모습 또한 조선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시민들과 학계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문화재청]]에서 2017년에 향원정 보수 공사를 할 때 철거한 후 그해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원 위치를 확인한 후 대한제국 말기에 촬영된 사진들을 바탕으로 GPS 측량과 3D 스캐닝을 통해 정밀측량자료를 확보하는 등 재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http://www.andong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8870|#]] 그리고 2020년에 복원 공사를 마쳤다. 복원한 다리는 새하얀 나무 다리인데 전통 목조 양식과 다소 이질적인 모양이라 향원정과 어울리지 않다고 느낀다는 시민들도 많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다리가 철제 아니냐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목교가 맞다. [[https://www.youtube.com/watch?v=EZobRvWoAH0|문화재청 공식 유튜브의 향원정+취향교 복원 과정 영상.]] 그러나 새로 지어진 취향교는 엄연히 옛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디자인 측면에서는 몰라도 재현 면에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1/11/06/7DAQPKC6OJF5DKGMJ7CHX6R5VU/|#]] 상술했듯 향원정과 취향교는 1885년(고종 22년) 즈음에 세운 것으로, 시기를 보면 오히려 근대 한옥에 가깝다. 1953년에 재건했던 다리의 구조와 특징에 대해서는 [[https://blog.naver.com/hanmun2014/220888903976|링크]] 참조. == 열상진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열상진원.png|width=100%]]}}} || || {{{#gold '''열상진원'''[*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2281895&ccbaKdcd=12&ccbaAsno=176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1 景福宮 洌上眞源}}} 향원정 서북쪽에 있는 [[샘]]. [[북악산]]의 [[지하수]]가 이 곳에서 솟아나 향원지 물을 채운다. 샘 주변을 덮는 돌과 뚜껑은 [[화강암|화강석]]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으나 뚜껑은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들었다. 이름은 ‘한강(洌上)의 진짜(眞) 근원(源)’이란 뜻이다. 열수는 [[한강]]의 다른 말이며 ‘열상’은 ‘열수 가’, 즉 ‘[[서울특별시|서울]]’을 의미하는데 편의상 열상을 열수와 같은 뜻으로 쓴 듯 하다. 비록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가 한강의 진짜 발원지이지만, [[궁전|왕궁]]에서 발원한 물이 한강으로 흐르기에 상징적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http://cafe.daum.net/YEsarang/NM4F/197?q=%EC%97%B4%EC%83%81%EC%A7%84%EC%9B%90|#]] 샘은 총 3층의 계단식이다.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지로 들어가게 했고, 특히 [[연못]]과 만나는 부분은, 동그란 홈에 물이 고이게 하여 향원지 물 높이보다 아래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한 번에 물이 내려올 때 생길 수 있는 [[연못]]의 [[파동]]을 최대한 줄여 향원지의 물을 잔잔하게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http://culzine.com/paper/view/574|#]] 이렇게 만든 데에는 [[물고기]]가 놀라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는 설과 연못에 비친 향원정과 여러 [[꽃]], [[나무]]의 [[그림자]]들을 흔들림없이 보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열상진원 샘물 바가지.png|width=100%]]}}} || || {{{#gold '''관람객이 열상진원 샘물을 떠마실 수 있게 비치했던 바가지.[br]2000년대 초중반 모습이다.'''}}} || [[2000년대]] 초중반에는 일반 관람객이 열상진원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했으며, 심지어 관람객이 [[샘|샘물]]을 떠마실 수 있게끔 작은 [[바가지]]까지 비치해 두었다. 이후로 언젠가부터 울타리를 둘러서 멀리서만 바라보게 하였다. == 기타 == * 1887년 3월 6일 아시아 최초의 [[전등]]을 [[건청궁]]에 설치했을 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바로 향원정 남쪽에 발전기를 설치했다. 그러나 향원지의 수온이 올라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 전등을 설치한 회사가 [[토머스 에디슨]]의 전기 회사였다. * 한반도 최초의 [[스케이트]] 공간이기도 하다.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1894년(고종 31년) 겨울에, [[서양]] [[선교사]]들이 얼어붙은 향원지 연못에서 [[피겨 스케이팅]] 시연회를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했는데 고종은 선교사들이 미끄러질 때마다 엄청 웃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 때 [[스케이트]]를 ‘얼음발굿’ ‘빙예(氷藝)’ ‘빙족희(氷足戱)’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이성]]끼리 서로 손을 잡았다 놨다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으나 얼음판 위에 놓인 의자를 훌쩍 뛰어넘는 곡예를 부릴 때는 어린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몇 번 더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으며 1895년 1월에는 아예 두 차례에 걸쳐 스케이트 [[파티]]를 열었는데 [[서울]]에 살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모였다. *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건청궁 옆 녹산에서 태운 뒤 남은 [[재]]를 버린 곳이 향원지이다. * 굉장히 아름다운 풍경에다 [[서울]]에 있어서 그런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출품작 중 가장 많이 나온 소재이기도 하다. 미술대회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와 더불어 경복궁을 홍보하는 사진 모델로 자주 나온다.[* 2017년 5월부터 2021년 10월까지는 장기간 복원 공사로 인해 가려져 있어서 저 시기에는 예외였다.] 둘 다 연못 가운데 섬이 있고 섬 위에 건물이 있는 구조인데, 아무래도 규모가 차이가 있다보니 경회루는 특별 관람을 통해 일반인들이 제한적으로나마 들어갈 수 있지만, 향원정은 그런 게 없어서 일반인들이 들어가서 볼 기회가 없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8_S1-yYsnfY)]}}} || || {{{#gold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같이 걸으시겠습니까? 🐧 왕이 된 펭수 |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X펭수〉 영상'''}}} ||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2021년 12월에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의 일환으로, [[펭수]]가 경복궁을 홍보하는 영상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새로 복원한 취향교 위를 펭수가 걷는 모습이 나온다.(영상 30초 ~ 34초) --[[에듀윌|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것 같은 멜로디이다.]]-- == 대중매체에서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정원|후원]]으로 많이 나왔다. 다만, 향원정을 처음 지은 것은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인데 [[임진왜란]] 전 조선 초 ~ 중기를 다룬 드라마에도 후원으로 나오는 [[창작물의 반영 오류|재현 오류]]가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주요 [[전각]]들은 거의 세트장을 배경으로 했지만 향원정만큼은 실물이 간간히 나온다. 아마 세트로 재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비용이 더 많이 들더라도[* 당연하지만 세트장보다 실제 [[궁궐]]의 촬영 대여료가 훨씬 비싸다.] 감수했던 것 같다. [[분류:경복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