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include(틀:한국의 정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아미산_굴뚝_봄_전경.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아미산_굴뚝_여름_전경.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아미산_굴뚝_겨울_전경.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아미산_굴뚝_가을_전경.jpg|width=100%]]}}} || ||<-2> {{{#gold '''아미산의 사계.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이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24&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25&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23&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22&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네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아미산_굴뚝_전경1.jpg|width=100%]]}}} || ||<-2> {{{#gold '''아미산[*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26&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아미산'''}}}[br]{{{-1 景福宮 峨嵋山}}}}}}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아미산,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높이'''}}}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 교태전]] [[정원|후원]]에 있는 언덕이다. == 이름과 역사 == === 통설 === [[이름]]과 역사의 유래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름 유래를 먼저 살펴보면, 가장 잘 알려져있는 설은 [[중국]] [[불교]]와 [[도교]]의 [[성지]] 중 하나인 아미산에서 따왔다는 것. 그 [[산]]이 어딘지도 설이 갈린다. [[산둥성|산둥성(山東省)]] 박산현에 있는 산으로 보기도 하고, [[쓰촨성|쓰촨성(四川省)]] 아미현의 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태종(조선)|태종]] 시절 [[경복궁 경회루|경회루]]를 지으면서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인공산을 만든 것이 아미산 역사의 시작이며, 교태전에서 태어나는 왕손이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의 [[기]]를 받으라는 상징적인 뜻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 회의론 ==== 하지만 상술한 이야기들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태종(조선)|태종]] 때에는 [[경복궁 교태전|교태전]]이 없었으며[* 교태전은 [[세종(조선)|세종]] 때 창건했다.] 조선 초기의 교태전은 중궁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손들이 기를 받고 태어나라는 의미도, [[경복궁 경회루|경회루]] 연못을 파서 만들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12_03A_29A_00280|《승정원일기》 1875년(고종 12년) 3월 29일 자 기사]]에,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신료들이 아미산의 이름과 역사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미산을 '아미사(蛾眉砂)'로 부르고 아미사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란 것이다. '아미사(蛾眉砂)'는 본래 풍수용어이다. 직역하자면 '누에나방(蛾)의 눈썹(眉)'이란 뜻으로 미인의 눈썹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풍수에서 아미사는 주산에서 내려온 지맥이 혈 자리에 닿기 전에 솟아오른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신하들은 아미사가 자연적으로 생성된 땅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당시 고종이 화재로 불탔던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일곽을 크게 고쳐 지으려고 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호조판서]] 민치상이 "'''교태전 뒤의 아미사(蛾眉砂)는 바로 하늘이 만든 것으로''', 그 아래에 전각을 세운 데는 깊은 뜻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고, 나중에 [[좌의정]] [[흥인군|흥인군 이최응]]이 지맥을 보아야한다고 아뢰자 고종이 "처음에는 아미사가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줄 알았는데, 근래에 들으니 바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고 답했다. 즉, 《[[승정원일기]]》 기록이 사실이라면, 아미 명칭은 [[중국]]의 명산과는 상관이 없으며 아미사는 인공 언덕도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추정하여 그린 그림 〈경복궁도〉를 보면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바로 뒤로 언덕이 그려져 있는데 이 언덕은 궁성 동북쪽 바깥에서부터 이어져 있다. 이런 일련의 자료를 볼 때 아미사는 원래 자연적으로 높은 지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A 출처: 《경복궁영건일기로 본 경복궁 중건》, 문화재청 著, 2021.] 그렇다면, '아미사(蛾眉砂)'가 어떻게 해서 [[중국]]의 명산에서 따온 이름 '아미산(峨嵋山)'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추측할 만한 기록 몇 개가 있다. '아미산'으로 처음 부른 시기는 1904년([[광무]] 8년) 언저리부터이다. 그 무렵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의 김택영 서기관이 친구 윤희구와 함께 [[경복궁]]을 둘러보았고, 붉은 [[모란|모란꽃]] 61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아미사를 아미산으로 비유한 내용이 김택영의 문집 《소호당집》에 있다. 김택영은 나중에 아미사의 풍광을 왕족 및 신료들에게 이야기했고 이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사촌동생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이 아미사의 모란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그때부터 '아미사'는 '아미산'으로 불렸고 이후 나온 공식 기록과 그림에도 '아미산'으로 적히게 되었다.[*A] 그리고 왜 [[경복궁 경회루|경회루]] 연못 흙 이야기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경복궁영건일기》에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270년 넘게 경회루 연못에 쌓였던 진흙더미들을 퍼냈고, 퍼낸 진흙들을 아미사에 쌓았다고 한다. 즉, 경회루에서 흙을 퍼온 것은 맞지만 [[태종(조선)|태종]] 시기가 아니라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에 그랬으며, 오롯이 경회루 연못 흙으로만 만든 인공산이 아니라 기존의 언덕에다 쌓았다는 것이다.[*A] 고종 때부터 [[경복궁 교태전|교태전]]을 중궁전으로 활용하면서 기존의 아미사를 왕비의 정원으로 만들기 위해 흙을 덧댄 것이다. 그것이 와전되어 태종 때 경회루를 축조하면서 나온 흙을 옮겼다는 오해가 생긴 모양이다. === 진실 === 종합하자면, 아미산은 [[태종(조선)|태종]]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원래 이름은 '아미사(蛾眉砂)'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중궁전의 후원이 아니었고, 자연적으로 솟은 지형이었다. 그러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비]]의 후원으로 만들었고 [[경복궁 경회루|경회루]]의 흙을 덧대었으며, [[대한제국]] 시기부터 '아미산(峨嵋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 복원 전의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아미산의굴뚝.jpg|width=100%]]}}} || || {{{#gold '''교태전 복원 전 아미산 모습[*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63&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화재로 불탄 [[창덕궁]] 내전을 [[이왕직]]에서 새로 지으면서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일곽을 전부 헐었지만 아미산은 건드리지 않아 무사했다. 1995년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교태전을 복원하면서 아미산 역시 교태전 후원으로서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후 몇 차례 보수, 수리를 거쳐 오늘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구조 == 교태전 [[건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는 대체로 평평한 편이다. [[암석|장대석 석축]] 2벌대를 쌓아 화계(花階) 4단을 만들어 괴석과 [[함]]같이 생긴 돌 [[연못]] 2개를 놓고 나무와 [[꽃|화]][[풀|초]]들을 심어 화려하면서도 운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는 총 13종이 심어져있는데 그 중 [[소나무]], [[회화나무]], [[감나무]], [[말채나무]]가 주를 이룬다. == 부속 시설 == === 낙하담과 함월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낙하담과 함월지2.jpg|width=100%]]}}} || || {{{#gold '''왼쪽이 낙하담, 오른쪽이 함월지이다.'''}}} || {{{+1 落霞潭 · 涵月池}}} 아미산에 있는, 마치 [[함]]처럼 생긴 [[암석|돌]] [[연못]]들로 말이 연못이지 사실상 [[수조]]이다. 낙하담이 동쪽에, 함월지가 서쪽에 있다. 낙하담(落霞潭)은 ‘[[노을]]이 내려 앉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낙하(落霞)’는 ‘떨어지는 노을’, 또는 ‘[[저녁]] 노을’이라는 의미이다. [[중국]] [[남북조시대|남조시대]] 때 [[소량|양나라]]의 [[황제]]였던 [[간문제(양)|간문제]]가 지은 ‘등성(登城)’이라는 [[시]]에 “저녁 노을은 금방 이어졌다 끊어지고, 저녁 물결은 때마침 다시 돌아오네.”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또한 초당사걸[* [[중국]] [[당나라]] 초기([[7세기]])의 중국 시단을 대표한 네 명의 [[시인(문학)|시인]].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이다.] 중 한 사람인 [[시인(문학)|시인]] 왕발--[[왕발(야인시대)|얘]] 말고--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에도 “저녁 노을(落霞)은 외로운 따오기와 함께 날고, 가을 물은 먼 하늘과 함께 한 가지 색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훨씬 유명하기에 여기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월지(涵月池)는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으로, [[달]]이 [[암석|돌]] [[연못]]의 [[물]] 속에 비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아미산이라는 공간과 연관시켜 보면 [[이백]]의 <아미산월가>에 나오는 “아미산에 떠 오른 [[가을]] [[밤(시간)|밤]]의 [[반달]]이여, [[달]] [[그림자]] 평강에 들고 [[강|강물]]은 흘러가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듯하다. === 굴뚝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810호 ||<|2> ← || '''811호''' ||<|2> → || 812호 || || [[경복궁 자경전#s-5.2|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 '''경복궁 아미산 굴뚝''' || [[경복궁 근정문|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1호}}}]]''' || ||<-2> {{{#fff {{{+1 '''경복궁 아미산 굴뚝'''}}}[br]{{{-1 景福宮 峨嵋山 굴뚝}}}}}}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경복궁 아미산,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주거시설 || || '''{{{#fff 수량}}}''' || 4기 || || '''{{{#fff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867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미산 굴뚝.jpg|width=100%]]}}} || || {{{#gold '''아미산 굴뚝'''}}} || [clearfix] ---- 아미산하면 4개의 [[굴뚝]]이 제일 유명하다. 교태전의 [[온돌|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든 굴뚝이다. 육각형이다. [[화강암]] 받침돌 위에 [[황토|황토색]] [[벽돌]]로 30단 정도를 쌓아 몸체를 만들었다. 몸체의 윗 부분은 소로와 창방 · 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다. 맨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가(煙家)를 [[점토]]로 만들어 두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십장생벽화.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십장생벽화 (1).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십장생벽화 (2).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십장생벽화 (3).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십장생벽화 (4).jpg|width=100%]]}}} || ||<-5> {{{#gold '''아미산 굴뚝의 십장생 벽화[*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72&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71&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70&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69&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네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13968&ccbaKdcd=12&ccbaAsno=08110000&ccbaCtcd=11|다섯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 또한 각 면 가운데마다 [[봉황]] · [[두루미|학]] · [[박쥐]] · [[해치]] · [[사슴]] · [[대나무]] · [[소나무]] · [[국화]] · [[매화]] · · [[불로초]] 등의 문양을 구운 [[벽돌]]로 집어넣고, 무늬 사이사이에 석회를 넣은 벽화를 설치했다. [[굴뚝]] 4개 중 3개는 나란히 놓여있지만 1개는 동북쪽 끄트머리에 건순각의 출입문인 건순문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있다. 교태전 일곽의 [[건물]]들은 전부 1995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이 굴뚝은 [[1860년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절의 모습 그대로이다. 거기에다 미적 [[가치]] 등이 뛰어났기에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아미산을 둘러싼 [[담|담장]]에도 [[황토|황토색]] [[벽돌]]로 격자무늬를 내고 [[꽃]] 문양을 장식하였다. 이는 [[굴뚝]]과 조화를 이룸과 동시에,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담장을 [[예술]] 그 자체로 [[승화]]시키는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 여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국립국악원 정문.png|width=100%]]}}} || || {{{#gold '''국립국악원 정문[*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아미산 굴뚝을 모티브로 [[국립국악원]] 정문을 만들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교태전, version=86, paragraph=7)]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