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만경전'''}}}[br]{{{-1 景福宮 萬慶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만경전,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건축시기'''}}} || [[1868년]] {{{-1 (창건)}}} / [[1917년]] {{{-1 (철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고적도보 만경전.png|width=100%]]}}} || || {{{#gold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만경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대왕대비전인 [[경복궁 자경전|자경전]]의 북쪽에 있었다. 현재 경복궁에는 남아있지 않다.[* 건물 자체는 창덕궁 경훈각으로 옮겨져 남아있다.] == 역사 ==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고종(대한제국)|고종]] 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자경전의 중소침으로 지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08018_003|#]] 대비전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 [[왕대비]] [[효정왕후]]와 [[대비]] [[철인왕후]] 중 누가 머물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873년(고종 10년)과 1876년(고종 13년)에 걸친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내전 권역 화재에도 무사했기 때문에 한동안 고종이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이 곳에서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를 열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2401027_001|#]]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507025_001|#]][[http://sillok.history.go.kr/id/kza_12508011_00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경훈각.png|width=100%]]}}} || || {{{#gold '''현재 창덕궁 경훈각으로 변한 만경전'''}}} ||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사라진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자재로 쓰이면서 사라졌다. 만경전 건물은 현재 [[창덕궁 경훈각]]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자료가 남은 주 건물이여서 경복궁 복원 공사 4단계(2031~2042)에 복원될 예정이다. == 구조 == ※ 현재는 변형된 건물이기 때문에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만경전의 사진과 《북궐도형》, 《정해진찬의궤》[*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을 축하하는 진찬연의 모습을 담은 의궤.]에 실린 《만경전도》의 모습을 토대로 서술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만경전도.png|width=100%]]}}} || || {{{#gold '''《만경전도》'''}}} || * [[기단]]은 4벌대의 장대석으로 놓았으며 3단짜리 [[계단]]을 정면에 3세트를 놓았다. 기단의 전면부 양 옆 역시 계단으로 되어있는데 따로 둔 게 아니고 기단 자체를 계단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초석|주춧돌]]과 [[기둥]]은 사각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중에서도 물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그리고 4개의 [[잡상]]과 토수를 놓았다. * 정면 9칸, 측면 4칸의 총 36칸으로 정면 기준 양 끝 칸은 [[누각|누]] [[마루]]가 1칸 씩[* 정면, 측면을 합친 실제 칸 수는 총 4칸,]구성되어있으며 누 마루 밑의 [[기둥]] 사이마다 [[나무]] [[판자|판]][[문]]으로 막아놓았다. 누 마루 안쪽에 [[온돌|온돌방]] 2칸을 두었고[* 이론 상 4칸이나 남북축으로 [[방]]을 트여 실제로 2칸이다.] 양 온돌방 사이에 [[대청]] 3칸[* 이론 상 6칸이나 [[공간]]을 전부 트여 1칸으로 사용하게 하였다.]을 두었다. 정면의 가장자리 칸은 [[마루|툇마루]]이나 뒷면의 가장자리는 온돌방으로 되어있다. 단, 대청과 연결된 뒷면의 칸은 툇마루이다. 이러한 구조는 같은 [[대비|대비전]]이자 한 때 [[왕]]이 머무르는 곳으로 쓰였던 [[경복궁 자경전|자경전]]과 [[경복궁 흥복전|흥복전]]과 비슷하다. 그리고 동남쪽 끄트머리 칸에 동쪽 행각과 연결된 복도를 설치했다. * 여느 궁궐의 침전처럼 건물의 사방으로 행각이 둘러싸고 있으며 총 7개의 문이 있었다. 남쪽에 양화문(養化門)과 광의문, 동쪽에 함춘문(咸春門)과 인양문(寅陽門), 북쪽에 평재문(平在門), 그리고 서쪽에 의춘문(宜春門)과 경성문(景成門)이 있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흥복전, version=3)] [[분류:경복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