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동십자각'''}}}[br]{{{-1 景福宮 東十字閣}}}}}}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동십자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1 (사간동 126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395년]] {{{-1 (창건)}}} / [[1867년]] {{{-1 (중건)}}}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십자각.png|width=100%]]}}} || ||<-2> {{{#gold '''동십자각[*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망루]]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복궁과 떨어져 도로 정 중앙에 섬처럼 놓여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58 ([[세종로]])이다. [[동아시아]]권에서는 [[궁전|궁성]] 정문 옆에 궁을 수비하는 [[망루]]를 두었다. 이것을 ‘[[闕|궐(闕)]]’이라고 부른다. 즉, ‘궁궐(宮闕)’은 ‘궁(宮)’과 ‘망루(闕)’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물론 [[지역]]과 [[시대]]에 따라 궐의 모습도 달랐다. 그래서 궐이 정문과 가까울 때도 있었고, 멀 때도 있었다. [[경복궁]]의 망루는 정문 [[경복궁 광화문|광화문]]과 꽤 떨어져 있었으며 궁성 동남쪽, 서남쪽 끄트머리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그 중 동남쪽 망루가 바로 동십자각(東十字閣)이다. 서남쪽 망루는 [[경복궁 서십자각|서십자각(西十字閣)]]인데 [[일제강점기]]에 헐렸고, 현재는 동십자각만 남아 있다. == 이름 == 십자각(十字閣)은 말 그대로 건물 평면이 ‘열 십(十)’자인 건물을 말한다. 그런데 [[경복궁]]의 망루는 평면이 사각형이라 원칙적으로는 십자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볼 때 용마루가 ‘열 십(十)’자로 교차하는 모습이며, [[망루]]와 맞닿은 [[담|궁장]]이 ‘열 십(十)’자 모양으로 교차해서 십자각이란 이름이 붙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F%99%EC%8B%AD%EC%9E%90%EA%B0%81(%E6%9D%B1%E5%8D%81%E5%AD%97%E9%96%A3)|#]]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십자각 원형.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십자각 원형2.png|width=100%]]}}} || ||<-2> {{{#gold '''경복궁 궁장과 붙어있던 시기에 촬영한 동십자각. 왼쪽은 궁성 밖에서, 오른쪽은 안에서 촬영한 것이다.'''}}} ||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나, [[망루]]라는 가장 기본적인 시설임을 감안할 때, 1395년([[태조(조선)|태조]] 4년)에 [[경복궁]]을 처음 지으면서 같이 조성한 듯 하다. 1427년([[세종(조선)|세종]] 9년)에 심하게 기울어져 철거했고, 이후 관련 기록은 없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3021_002|#]] 다만,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건물인 만큼 머지않아 재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복구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3006_005|《고종실록》의 이 기사]]를 보아 1866년(고종 3년) 무렵에는 이미 완공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이 때 [[일본 제국|일제]]는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 흥례문]]과 [[경복궁 영제교|영제교]] 자리에 있었다.] 박람회장 정문인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조선총독부 완공 직전인 1925년에 경복궁 동쪽 궁장(정확히는 [[경복궁 건춘문|건춘문]] 북쪽,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으로 옮겨졌다.]까지 [[도로]]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길을 확장하면서 동십자각을 에워싼 궁장을 헐었다. 그래서 동십자각은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되었고, 망루 위로 올라가는 [[계단]] 역시 이 때 사라졌다. 사실 저 정도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1923년 일제가 조선부업품공진회 개최와 동시에 [[경복궁 영추문|영추문]] 앞으로 [[서울 전차|전차]] 선로를 개설했는데, 원활한 전차 통행을 위해 커브 길을 만들면서 동십자각과 대칭을 이루던 [[경복궁 서십자각|서십자각]] 건물 자체를 다 헐었기 때문이다. 동십자각 역시 [[삼청동]] 방향 전차 선로 개설 계획으로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천만다행으로 선로가 삼청동이 아닌 [[안국동]] 방면으로만 개설되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8.15 광복|광복]] 이후 1972년 8월 30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이미 [[경복궁]] 전체를 사적 제117호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6년 8월 28일 자로 지정 해제되었다. [[1990년대]] 들어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할 때 광화문 권역 복원과 함께 동십자각과 [[경복궁 서십자각|서십자각]]을 원형으로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동십자각의 경우, 정확히는 경복궁 담장과 잇고 없어진 계단을 복구하기로 한 것. 그러나 동십자각 담장 연결 시 도로가 좁아지는 문제가 생겨 [DATE] 현재까지 복원을 못하고 있다. 2018년 문화재청은 서울시와 합의 끝에 동십자각은 현 위치에 두고 궁궐 담벽만 연결한다고 발표했다. 지금의 도로의 절반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우회도로를 완성한 후 본격적인 복원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 구조 == * 북쪽 지면이 더 높고 남쪽이 더 낮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un2014&logNo=220865734804|#]] * 축대는 장대석을 7단으로 쌓아 만들었다. 위로 갈수록 돌이 조금씩 작아지는 것이 특징이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un2014&logNo=220865734804|#]] 하단에는 당초문을 장식해두었으며 축대 각 면마다 빗물이 흘러내릴 수 있게 석루조를 설치했다. 석루조 모양은 서수의 머리 모양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613#|#]] * 축대 위에 [[벽돌]]로 만든 여장을 사방에 둘렀으며 벽돌 여장의 위, 아래, 가장자리에는 화강석을 두었다. 여장의 벽돌 사이마다 가로가 긴 ‘열 십(十)’자 형 구멍을 뚫었다. 서쪽 방향 여장 가운데에는 누각으로 들어가는 협문을 설치했다. 협문의 몸체는 돌, 지붕은 전돌, 문짝은 [[나무]]로 만들었다. 문 아래로는 지면과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없앴다. 다만, 계단이 있었던 방향으로 축대가 약 2m 정도 나와있어 계단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un2014&logNo=220865734804|#]] * 여장 안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 짜리 누각이 있다. [[지붕]]은 사모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이익공이며 출목이 없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화노반형의 청동 절병통을 두었으며 추녀마루에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용두]]와 [[잡상]]을 올렸다. 기둥 사이 공포의 하단과 창방 사이에는 화반을 두었으며 기둥과 창방 아래의 가장자리에는 낙양각을 설치했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으며 [[기둥]]은 원형이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un2014&logNo=22086573480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613#|#]] * 가장자리 툇간은 외부와 통해있으나 가운데 1칸은 사방에 교창, 창, 문이 있는 [[방]]이다. 교창은 빗살이고 창과 문은 띠살 무늬를 한 사분합문이다. 가운데 칸의 동, 남, 북 면은 머름이 있는 창이며 서면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툇간 천장은 구조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나 가운데 칸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툇간 바닥은 전돌이나 가운데 칸 바닥은 널마루이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un2014&logNo=220865734804|#]] == 여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십자각 조선박람회.png|width=100%]]}}} || || {{{#gold '''조선박람회 개최 당시 동십자각을 덮은 조형물'''}}} || 상술한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 때, 동십자각과 비슷하지만 훨씬 크기가 큰 임시 조형물을 동십자각 건물에 덧씌웠다. * [[사직로(서울)|사직로]]의 종점이자 [[율곡로(서울)|율곡로]], [[삼청로]]의 기점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fKGqDg3Zz0)]}}} || || {{{#gold '''동십자각 조각상 발견을 다룬 [[KBS 뉴스 9|{{{#gold '''〈KBS 뉴스 9〉'''}}}]] 클립'''}}} || 동십자각 계단 입구에 있었다가 담장 철거 시 사라졌던 [[서수]] 조각상을 [[문화재청]]에서 2019년에 발견했다. 보관 장소는 쌩뚱맞게도 [[창덕궁]] 현장 사무실 근처. 궁궐 안에 있는 석조물 현황을 조사하다가 찾았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담장을 복원하고 서수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말로만 하지 말고-- * 화가 [[김용준#s-1|근원 김용준]]의 데뷔작이 동십자각의 담장을 허무는 모습을 그린 〈동십자각〉이다.[* 스승 이종우의 회고에 따르면, 원제는 〈건설이냐? 파괴냐?〉 였다고 한다.]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4년에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동십자각〉을 출품해 입선했다고 한다.[[http://www.koreanart21.com/education/artAppreciation/view?id=5661|#]] * 근처에 《[[서울경제신문]]》 사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경제신문의 사내 [[칼럼]] 이름이 〈동십자각〉이다.[[https://www.sedaily.com/Search/?scText=%EB%8F%99%EC%8B%AD%EC%9E%90%EA%B0%81|#]] [각주]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