謙益 ?~? 겸익은 [[백제]]의 [[승려]]로 율종의 [[시조]]이다. [[526년]](백제 [[성왕(백제)|성왕]] 4년)에 혼란스러운 정국의 [[인도]][* [[인도]] 유학승으로 비슷한 인물로 통일신라의 [[혜초]]가 있다.]에 다녀와서 율종을 개창하였다. 그는 인도 중부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율부(律部)를 전공하여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 성왕이 예를 갖추고 마중을 나가 환영했다. 겸익과 배달다삼장은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면서 인도에서 가지고온 율문을 [[백제]]의 고승 28인과 함께 율부 72권으로 번역했다. 당시 백제의 고승들은 겸익을 도와 윤문(潤文-글을 윤색함)과 증의(證義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4660&mobile&categoryId=2886|링크]])를 했으며, 그 후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 율에 대한 소(疏-주석) 36권을 지어 성왕에게 바쳤다. 이때 번역한 율은 《범본아담장오부율문(梵本阿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이라고 한다. 아담이나 비담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준말이지만, 아비달마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성왕이 이 신역율본을 태요전(台耀殿)에 보관하여 널리 보급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붕어]]했다. 사실 당시 [[중국]]에 이미 《오분율(五分律)》 등 율장이 몇 가지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익은 굳이 인도로부터 직접 원전을 가져와 번역한 것이다. 겸익의 율학 때문에 백제 [[불교]]는 계율 중심이 되었고, 그 후 [[일본]] 율종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겸익이 인도에 갈 때 바닷길을 탔는지 [[실크로드]]를 탔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병익]] 교수의「韓國과 西域: 近世以前의 歷史的 關係」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20세기에는 해로로 갔으리라 유추한 원로 사학자도 많았다. 그러나 비단길을 따랐을지, 향신료길을 따랐을지는 여러 역사 속 논제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 백제의 교류 범위가 꽤나 넓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분류:백제의 승려]][[분류:아시아 탐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