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격포행궁터 전경.png|width=100%]]}}} || || {{{#gold '''격포행궁 터 전경[* 위 사진의 비닐하우스 자리가 격포행궁의 터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1 格浦行宮}}} [[조선시대]]에 있었던 [[행궁]].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었다. 다른 [[행궁]]들과는 달리 지금은 존재 자체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부안행궁(扶安行宮)'이라고도 한다. == 상세 == 1640년([[인조]] 18년)에 호남관찰사 [[원두표]](元斗杓)가 건립을 요청하여 세운 행궁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부안에 설치된 전라우수영 관하 격포진(格浦鎭)에서 400 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여지도서》나 《호남읍지》 등 문헌과 〈부안격포도형변산좌우도〉라는 지도에도 그 위치만 표시되었을 뿐이라, 규모는 어떠했고 전각들은 어떠했는지 등 세부정보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격포행궁을 건립한 데에는 [[병자호란]] 때 기억이 한몫한 듯하다. 격포행궁의 이름이 된 격포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아 진을 설치했다. 《[[경종실록]]》에 격포진에 대해 전라감사 강이장이 '[[강화도]]와 거리가 심히 멀지 않으므로, 강화도에서 옮기게 된다면 이곳이 상륙 지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검영(檢營)을 두었다가, 여러 가지 의논으로 인해 도로 파직하였다.' 하고 설치 경위를 설명하는 기록이 있다. 강화도의 배후를 지원할 기지로 격포진을 주목,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부안에도 행궁을 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강이장은 격포진을 두고 '강화도와 가깝기는 하지만 특별히 요해처라고 할 만한 지리적 이점도 없고 배를 감출 곳도 마땅히 없고, 배가 이 지역을 건너다 번번이 침몰하기도 한다.'는 이유를 들어 혁파하다고 주장했다. 《[[영조실록]]》에는 1754년([[영조]] 30년)에 호남 지역의 어사로 나갔다 돌아온 홍자(洪梓)가 보고서를 올려 '격포 행궁(格浦行宮)을 설치한 것은 장차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행궁의 담 밖은 텅 빈 채 백성의 마을이나 창고의 저축이 하나도 없다.'며 격포의 폐기된 둑을 보수하고, 이어서 행궁의 둔전(屯田)을 만들어 백성을 모아 경작하게 하며 그 대가로 세금을 거두자고 주장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격포진이 설치된 뒤에도. 계속 폐지와 재설치하기를 반복했던 점으로 보아, 격포진이 과연 전략적으로 가치가 충분한지를 두고 조선시대에도 논란이 심했던 듯하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에서는 '격포진은 진이라고 이름만 걸어놨지 배 한 척도 없다.'고 언급했다.] 격포진이 철폐된 이후 부안의 전략적 위치도 하락해 행궁의 가치도 함께 쇠락한 것 같다.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가 부안행궁의 흔적을 답사한 글을 기고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현지 주민들의 반응은 "그런 게 있었나?"라는 반응이었는데 일흔 넘은 노인 한 분 중에 가까스로 아는 사람이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고.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20701033737191002|#]]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분류:행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