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 추존 국왕)] [[파일:f9ec28292e1a_image.png]] [목차] == 개요 == 거타지(居陀知)는 [[신라]] [[진성여왕]] 때 인물이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명궁으로, 진성여왕의 막내 아들인 양정(良貞)[* 삼국유사 원전에는 양패(良貝)라고 나오며, 양정이라는 표기는 이 거타지 설화를 그대로 베낀 작제건과 서해용왕 설화에 나오는 이름이다.]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호위하던 50명의 궁수 중 한 명이다. 거타지 설화를 통해 신라 하대의 [[용]] 신앙 쇠퇴와 당시 민중들의 절박한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거타지를 민중의 영웅, 늙은 여우는 당대 지배층, 노인과 그의 자손들을 착취 당하는 피지배층으로 본다. 거타지 설화는 이후 『[[고려사]]』의 [[작제건]] 설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작제건은 [[태조(고려)|왕건]]의 할아버지인데, 설화의 구성이 이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해서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먼저 있었던 신라 거타지 설화를 고려 왕조가 세워진 후 왕건 가문의 조상들을 우상화하기 위해 [[복붙]]해 윤색한 흔적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는 '''활을 잘 쏘는 사람'''과 '''고려 사람'''이 공통적으로 [[동명성왕]]을 뜻하고, 이야기의 무대인 곡도가 현재의 [[백령도]]라는 점에서 [[통일신라]]로 편입된 [[패서]]의 [[고구려]]계 유민들 사이에서 퍼지던 설화가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효녀 지은]] 설화와 함께 [[심청전]]의 모태가 된 여러 설화 중 하나로 국문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 전승 ==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603&cid=62146&categoryId=62146|진성여대왕과 거타지]] 양정 일행이 [[서해]]를 항해 중에 곡도(鵠島)에 이르자 큰 풍랑이 일어 10여일간 발이 묶였다. 양정은 이를 근심하여 점을 치게 하니, 섬 안에 신령한 연못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괘가 나왔다. 이에 연못 위에 제물을 차리니 연못에서 한 길이 넘는 물이 치솟아 올랐다. 그날 밤, 양정은 꿈 속에서 어떤 노인에게 활 잘 쏘는 사람 한 명을 남기면 순풍을 얻는다는 계시를 받는다. 다음 날, 양정은 나무조각 50개에 궁수들의 이름을 적고 물에 던져 가라앉은 이름의 사람을 섬에 남게 하였다. 던져진 나무 중 거타지의 이름이 가라 앉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그를 섬에 두고 [[당나라]]로 떠났다. 거타지는 근심에 싸여 섬 위에 서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거타지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자신을 서해약(西海若, 서해용왕)이라 소개하고 하늘에서 중 하나가 내려와 자기 자손들의 간을 빼어 먹는다고 하였다. 노인은 거타지에게 중을 쏘아 죽일 것을 청하였다. 거타지는 다음날 아침까지 연못 근처에서 잠복하였다. 과연 아침에 해가 뜨자 웬 중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연못에서 주문(眞言)을 외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늙은 용이 떠올랐고, 중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고 하였다. 거타지는 빠르게 활을 겨누어 중에게 쏘았고, 화살에 맞은 중은 [[요호|늙은 여우]]로 변하였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노인이 거타지 앞에 나타나 고마움을 표하고 자신의 하나 남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거타지는 이를 받아들였고 노인은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그의 옷 속에 품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마리의 용으로 하여금 거타지를 받들게 하여 사신의 배를 따라 그의 배를 호위케 하였다. 거타지가 탄 배가 당나라 해안에 다다르자, 이를 본 당나라 사람들은 두 마리 용이 신라 배를 호위하는 것을 황제에게 알렸다. 황제는 거타지를 비상한 인물로 여기고 잔치에 초대하여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일을 마치고 신라에 돌아온 거타지는 가슴에서 꽃을 꺼내 여인으로 변하게 하고 함께 살았다. == 기타 == [[라이트 노벨]] [[나와 호랑이님]]에선 조연으로 등장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나와 호랑이님/등장인물, 앵커=기타 인물)] [[분류:신라]][[분류:한국 신화·전설/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