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수나라와 당나라 관련 문서)] * [[고사성어]], [[고사성어/목록]] ||||||||||||||<:>'''[[고사성어|{{{#white 고사성어}}}]]'''|| ||<:>{{{+5 '''開'''}}} ||||<:>{{{+5 '''元'''}}} ||||<:>{{{+5 '''之'''}}} ||||<:>{{{+5 '''治'''}}} || ||<:>열 개 ||||<:>으뜸 원 ||||<:>갈 지 ||||<:>다스릴 치 || [목차] == 개요 == [[당현종]] 재위 시기 [[태평성대]]를 일컫는 성어. [[연호]]가 개원(開元)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직역하면 개원의 치세. 개원성세(開元盛世)라고도 한다. == 상세 ==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은 즉위 후 연이은 [[정변]]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빠르게 수습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해 [[측천무후]] 시기부터 전횡되어 왔던 폐단을 시정하며 [[태평성대]]를 열게 된다. ~~정작 당현종의 [[관료]]들은 측천무후 때 다 등용되었다는게 함정~~[* 물론 기존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능력인 만큼 현종이 그만큼 뛰어난 [[군주]]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 당나라는 내적으로는 [[인구]]가 증가하고(5000만명 이상) 생산량이 늘어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으며, 외적으로는 [[절도사]] 직책 신설과 [[모병제]] 등으로 인해 [[군사력]] 강화와 이민족 지배력 강화라는 성과를 냈다. 이는 [[돌궐]] 같은 북서방 외세들의 권력 암투 등으로 인해 그들의 힘이 약해진 운도 한몫했다. 시기상으로는 개원이라는 연호를 썼던 [[713년]]~[[741년]]. 하지만 742년 [[당현종]]은 연호를 천보로 바꾸며 --망했어요-- 기존의 청렴한 이미지와 매치되지 않는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하는데, 다만 개원지치 시기인 [[73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그 기미가 보이긴 했다. 하여튼 천보난치 시기 [[당현종]]은 그 유명한 '''[[양귀비]]'''에게 빠져 향락에 빠졌고, 재상 [[이임보]]는 전횡을 일삼았으며, [[절도사]]는 너무 막강해져 폐단을 일으키고, 군대는 [[이슬람]] 세력과의 지속적 충돌로 약해지다 못해 나중에는 [[당나라 군대]] 그 자체가 되고 이후 몇차례 중흥기가 오지만 [[안사의 난]] 이전과 비교하기에는 매우 딴판으로 변해버린다. 근본적으론 현종의 직무태만이었으며 동시에 군사제도의 운영과 배치, [[안록산]]과 [[양국충]]의 권력다툼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 쓰임새 == [[태평성대]]의 대명사 중 하나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다만 다른 태평성대 시절과 달리 바로 뒤의 충격적인 몰락 때문인지 [[시망]] 테크트리 바로 직전(...)의 태평성대를 말할 때 개원지치가 많이 쓰인다. 다만 그럼에도 중국사에서 특히 당의 태평성대를 논할 땐 [[정관지치]]와 함께 꼭 언급되는 시기이긴 하다. 사실 현대의 평가로 치자면 [[문제(수)|개황성세]]나 [[문경지치]] 쪽이 더 나은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으나, 전자는 북방민족 냄새가 강하고, 후자는 도가적인 무위지치를 지향한 시대라,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완전히 굳어진 다음에는 이야기가 잘 안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근데 정작 당나라도 [[노자]] 숭상한건 함정-- 그 외 청의 [[강건성세]]도 있다. [[요]]/[[순]]임금의 치세나 주나라 [[성왕(주)|성]][[강왕(주)|강]]지치 등도 언급이 되나 기록이 별로 없어 거의 전설 취급. [[분류:고사성어]][[분류:수당시대]][[분류:중국사/전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