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행정구역)] ||
{{{#670000 '''개경 관련 둘러보기 틀'''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후삼국시대 도성들)] [include(틀:역대 한국의 수도)] [include(틀:개성시 역사)] }}} || ||<-3> '''[[파일:고려 의장기.svg|height=15]] [[고려|{{{#000,#ddd 고려}}}]]의 [[경(행정구역)|{{{#000,#ddd 삼경}}}]]'''[br]'''{{{+1 개경}}} (개성부)'''[br]開京 {{{-1 (開城府)}}}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koreanhistory.org/1086326604.jpg|width=100%]]}}} || ||<-2> '''하위 행정구역''' || 5부 35방 344리[* [[고려]] [[현종(고려)|현종]] 당시] || ||<-2><|2> '''전신''' || [[개성시/역사#s-2|송악군]] || ||<-2> [[개성시/역사#s-2|개성군]] || ||<-2> '''설치''' || [[919년]] || ||<-2> '''폐지''' || [[1395년]] || ||<-2> '''후신''' || [[경기도]] [[개성시/역사#s-4|개성부]] || ||<-2> '''현재''' || [[개성시]] || || [[파일:고려_개경_만월대_정도전(드라마).png|width=100%]] || ||
[[KBS1]]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묘사된 [[여말선초|고려말]] [[개성부]] 일대 모습[* 고증에 꽤 공을 들인 이미지로, 실제 풍경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민가의 기와집이 적다는 《[[고려도경]]》의 묘사를 근거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충선왕]] 때 대대적으로 개경의 가옥들을 기와집으로 바꾼 기록이 남아있다. 또 개경엔 부유한 [[귀족]]과 관료들의 거대한 저택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기와지붕이 많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고려도경》에도 선의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사치스럽다는 묘사가 있다. 더욱이 고려도경은 작성년도가 1123년이고, 드라마 정도전은 여말선초 즉 1390년대를 전후한다. 즉 200년 사이 기와집이 널려있는 도시로 바뀌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수도였던 도시. [[철원]]이 수도였던 건국 극초기 1년과 [[대몽항쟁]] 당시 [[강화도]]의 [[강도(고려)|강도]]로 피난간 38년, 그리고 [[우왕]]과 [[공양왕]] 당시 [[서울|남경]]으로 [[천도]]한 10개월 가량을 제외하면 '''434년간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그렇기에 [[5도 양계]] 중 어떤 [[도(행정구역)|도]]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경기(행정구역)|경기]]라는 [[행정구역]]에 속했다.[* 당시 서경이었던 [[평양]]에게도 [[서경기]]가 있어 [[부수도|제2수도]]로서의 대우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행정제2수도는 현대 [[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 그 가운데서도 [[행정중심복합도시]]의 포지션, 경제제2수도는 [[현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광역시]]급 포지션으로 보면 된다.] == 행정구역 변천사 ==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역성혁명]]으로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왕조]]를 세우면서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 왕씨]] [[가문]]의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옮겼다. 이듬해인 919년, 수도의 이름을 ''''개경(開京)''''이라 하고 송악과 [[개성]]을 통폐합하여 ''''개주(開州)''''를 설치했다.[* 도읍은 송악인데, 새로운 고을의 이름은 정작 도읍의 옆동네인 개성에서 따온 것.] 그렇게 '개경 개주'가 탄생했다. 960년, [[광종(고려)|광종]]은 개경을 '''[[황도(동음이의어)|황도]](皇都)'''로 승격시켰다.[* 동시에 서경은 ''''[[서도]](西都)''''로 승격되었다.] 그리하여 '황도 개주'가 되었다. 35년 뒤인 995년, [[성종(고려)|성종]]이 황도를 ''''개경(開京)''''으로, 개주를 ''''[[개성부]](開城府)''''로 고치면서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개경 개성부'가 탄생했다.[* '개성'이란 지명이 옛 송악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포괄하는 지명으로 완전히 굳어지면서 지명의 지위가 확장 및 역전되었다.] 1018년, [[현종(고려)|현종]]이 개성부를 철폐해 개경만 남겼다.[* 철폐된 개성부 지역은 [[개풍군|개성현]]과 [[장단군|장단현]] 2현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1062년, [[문종(고려)|문종]]이 개성부를 다시 설치해 '개경 개성부'로 돌아갔다. 1308년, [[충렬왕]]은 '개경 개성부'를 '개성부 개성현'으로 격하시켰다.[* 이는 [[원 간섭기]]의 영향으로, [[제후국]]의 도읍에 [[천자]]의 도읍에만 쓸 수 있는 서울 경([[京]])자를 감히(?)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시에 [[동경]]은 [[경주부|계림부]], [[남경]]은 [[한양부]], 강도는 [[강화부]]로 격하당했다.] 1390년, [[공양왕]]은 개성현을 '''경기좌도(京畿左道)''', '''경기우도(京畿右道)'''로 나누었다.[* 즉 '개성부 / 경기도'가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도 영향을 주어 수도와 수도권이 '[[한성부]] / [[경기도]]'가 된다.] == 당시 인구 == [[고려사]]에 따르면 강화로 천도하기 직전의 개경인구는 10만호로 표현되고 있다. 한 호당 5명으로 추산하더라도 대략 '''50만명'''에 달하는 큰 도시로 후대 조선의 [[한양]]은 물론이고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도 [[남양주시]], [[포항시]], [[김해시]] 등 전국 20위 안에 드는 상당한 수치다. 심지어 30만 명 안팎인 현재의 개성시보다도 인구가 많다. 물론 [[신라]]의 [[서라벌|금성]] 17만호 기록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이론이 분분하다. 당시 전근대 농업국가인 고려에서, 후대 조선 왕조 한성부나 [[태봉국 철원성]]터, 신라 [[월성]] 등보다도 좁은 입지에 자리잡은 도시가 [[북송]]의 [[카이펑]],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이슬람 제국]]의 [[바그다드]] 등의 당시 세계도시와 맞먹는 인구를 보유했다는 점은 납득이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 또한 추론일 뿐이다.[* 신라 금성의 17만호, 개경의 10만호 기록을 유독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또한 고려의 농업생산력, 전체 인구 등에 대한 부분도 연구의 소지가 많다.] 연구학자에 따라 당대 개경의 화재 기사 등을 토대로 개경의 인구집적도가 상상 이상이라는 점, 개경의 도성크기가 한성부보다 크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10만호 설을 인정하는 이도 있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10~13만호가 아니라 10~13만명이라도 전세계 10위권에 드는 거대 도시에 가깝다. == 당시 건축 == [[파일:external/www.koreanhistory.org/1086326604.jpg|wide=100]][* 가장 바깥의 성이 [[나성]](羅城), 서북쪽에 있는 눌리문 - 광화문이 있는 성이 [[황성]](皇城), 내[[제석원]]이 있는 작은 성이 궁성(宮城)이다. 중부와 북부를 감싼 회색으로 된 성은 우왕 ~ 공양왕 대에 추가로 지은 성이다.] 주요 건축물인 '''[[만월대]]'''[* 만월대는 조선시대에 붙은 이름으로, 당시엔 특정 명칭이 없고 단지 본궐, 정궁 등으로 불렸다.]를 세운 것은 왕건 즉위 직후인 919년이다. [[http://blog.naver.com/unigaeseong/120031395214|개경의 당시 모습]] [[여요전쟁]]으로 [[파천]] 당시 크게 피해를 입은 이후 [[강감찬]] [[상원수]]의 건의로 1029년([[현종(고려)|현종]] 20년)에 외성(外城)인 '''[[나성]](羅城)'''을 축성했다. [[왕가도]]가 [[공밀레|장정 24만명과 기술자 8천여명과 현종 즉위년부터 20년간 쌓았으며]], 현종 당시 성안의 관아 및 민가들은 [[오부|5부]](동, 서, 남, 북, 중) 35방 344리였다고 한다. 1011년, 현종은 '''[[황성]](皇城)'''을 쌓아 궁성 - 황성 - 나성 체제를 완성시켰다. 황성은 [[천자]]만이 지을 수 있는 성이다.[* 동시에 서경에도 황성을 세운다. [[장락궁]] 문서 참조.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했기에 황성이 없다.] 개성 시가지를 지형조건에 맞추어 조성했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바둑판식 격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의 [[서라벌|금성]],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 시대]]의 [[교토|헤이안쿄]]와 같이 질서정연한 형태의 도시구조가 아닌 풍수지리적인 자연스러운 도시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송]]의 수도 역시 [[운하]]로 둘러싸인 [[카이펑]]이었으니 중세 수운에 걸맞는 수도라고 할 만하다. 다만 후대의 [[한성부|한성]]이나 [[송나라]]의 카이펑과는 달리 수도 바로 인접 지역에는 큰 [[강]]이 없었던 게 당대에도 약점으로 여겼던 듯. 일단 [[예성강]], [[임진강]]이 동서로 지나기는 하나 시가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양은 위의 두 [[하천]]보다 [[크고 아름다운]] '''[[한강]]'''이 지척에 위치하여 수운에서는 유리했다. 여러 전란에도 지금까지 이때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개성 남대문]], [[선죽교]], [[만월대]]터, [[공민왕릉]], 박연폭포, [[송악산]] 개성 첨성대 등. 개성 남대문 외에도 내성에는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6개의 성문이 더 있었는데 개성 남대문을 제외하고 지금은 전부 없어져 터로만 남았고 서소문은 사진으로만 남았으며, 남대문은 [[6.25전쟁]] 당시 문루가 박살나서 [[1954년]]에 복원했다. == 관련 문서 == * [[개성]] * [[개성부]] * [[개성시/역사]] * [[송악]] * [[황도]] * [[중경]] * [[고려]] * [[경기(행정구역)]] * [[5도 양계]] * [[강도(고려)]] * [[개성 왕씨]] * [[전성기]]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개성시/역사, version=289)] [[분류:개성시]][[분류:개성시의 역사]][[분류:한국의 옛 수도]][[분류:고려의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