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top1=강화군)] [목차] [[강화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현재는 일개 군이긴 하지만, 강화도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며, 여러 역사적인 사건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고을이었다. == 선사시대 ==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 청동기시대 == [[청동기 시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많은 [[고인돌]]이 건립되었다. == [[고조선]] ==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에는 [[단군]]이 쌓았다는 전설이, 정족산의 [[정족산성|삼랑성]](三郞城)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각각 전해진다. == [[원삼국시대]] == [[마한]]의 [[대석삭국]]인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3세기 이후, 4세기쯤 백제에 병합되었다. == [[삼국시대]] == [[삼국시대]]에는 지명으로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강]] 및 [[임진강]]과 [[예성강]]의 입구라는 입지 탓에 삼국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맨 처음 강화를 차지한 나라는 [[백제]]. 서해안을 통제 및 방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요새인 '''관미성(關彌城)'''[* 다른 이름은 각미성(閣彌城). 같은 이름을 다르게 음차했거나 한자를 오기한 것이다.]의 유력한 위치로 거론된다. 성은 주로 치소를 가리켰으니 행정구역상으론 관미군(郡) 혹은 관미현(縣)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느 쪽이었을진 알 수 없으나 이후에도 군이었던 걸로 봐선 관미군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 즉 대석삭국이 백제에게 점령되고 최초로 설치된 행정구역은 관미군(關彌郡)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관미성은 함락되고 고구려 치하에서 '''혈구군(穴口郡)'''으로 개칭된다. 당시의 강화도에는 혈구군 및 혈구군의 관할인 동음나현(冬音奈縣, 하점면), 수지현(首知縣, 양도면)이 있었고 인근 [[교동도]]에도 역시 혈구군 관할의 고목근현(高木根縣, 교동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혈구군은 이후 [[신라]]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독재자]]이자 [[명장]]인 [[연개소문]]이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고려산 등에는 연개소문 관련 전설들도 전해진다. 하지만 고구려 명문가인 연씨 가문이 [[평양시|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화도에 정착해 연개소문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정황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보통은 [[전설]]로 취급된다. 다만 그런 전설이 그냥 남는 건 아닌 만큼 연개소문 당대 혹은 이후에 무언가 얽혔던 역사가 있었을 거라 추정된다. == [[남북국시대]] == [[신라]]의 영토에 흡수된 이후로도 혈구군으로 유지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한화정책으로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된다. 이를 따라서 동음나현은 호음현(沍陰縣)으로, 수지현은 수진현(守鎭縣)으로, 고목근현은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된다. 844년 8월 신라 제46대 [[문성왕]]이 서해안 방비 거점이었던 관미성의 역사를 이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한다. 이것이 근현대까지 천 년 이상 방어 시설로 활용된다. == [[고려시대]] == [[고려]] [[왕건|태조]] 때 강화현(江華縣)으로 개칭되어 비로소 현재의 명칭이 정립되었다. 고려시대 왕이나 왕족이 유배를 자주 가던곳이고 고려 전기 무역 거점 [[벽란도]]의 관문으로 번영을 누렸고, [[여몽전쟁]] 시기에는 [[몽골 제국]]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개경]]에서 천도하여 38년 간 '''정식''' 수도로 기능했다. 이때의 이름이 바로 [[강도(고려)|강도(江都)]]. 장기간 전투로 인해 삼별초와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이탈하게된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궁궐과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버렸다. 고려의 왕릉도 대한민국(남한)에서 4기가 존재하는데 그 중 3기가 이 강화도에 있다. 다만 한 기가 유실되었다. 다만 고려 [[고종(고려)|고종]]의 [[강화고려홍릉|왕릉]]이 올라가기 힘든 산중턱에 자리잡고있고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고려 [[희종(고려)|희종]]의 왕릉인 석릉도 초라하긴 마찬가지다.[* 그 외에 [[강종(고려)|강종]]의 후릉도 강화도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후릉은 유실된 상태다.] 그 외에 왕비릉인 가릉과 곤릉도 있다. 가릉은 [[충렬왕]]의 어머니인 [[정순왕후 김씨(고려)|정순왕후 김씨]], 곤릉은 강종의 후비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왕후 유씨의 능이다. 하지만 국력이 약할 때라 그런지 봉분도 석물들도 전부 초라하다. 고대의 [[고구려 왕릉]], [[백제왕릉]], [[신라왕릉]], [[가야왕릉]], [[발해왕릉]] 등, 그리고 [[조선왕릉]]의 깔끔한 봉분과 수준 높은 석물들과 비교했을 때 [[고려왕릉]]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무신정변]] 이후에 [[무신정권]]이 대대로 해먹었다. 어쨌든 왕권도 실추되었고 나라도 침략을 받는 처지였지만 강화도의 국내에서의 상대적인 지위만 보자면 일약 [[리즈 시절]]이라고 할만한데, 강화의 인구가 10만에 달해서 [[2018년]] 현재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개성시|개경]] 복귀 이후 반발한 [[삼별초]]가 이곳에서 [[삼별초의 난|거병했으나]] 이들은 곧 [[진도군|진도]]로 남하했다. 고려말 왜구들이 이곳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 [[조선시대]] == [[조선]] [[이성계|태조]]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요충지로 기능했다. 수도에서 가까운 섬이라는 입지 덕에 유배지로도 애용되었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이 강화로 유배당한 대표격 인물. [[임진왜란]] 당시는 주 전장[* 주로 남해안과 [[영남대로]] 일대가 주 전장이었다.]에서 비껴난 탓에 피해가 적었다. 이후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는 당시 국왕이었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했다. 그 다음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실은 피신에 성공했으나 청군에게 길이 막힌 인조 본인이 강화도로 넘어가지 못했고, 차선책인 [[남한산성]]으로 파천한다. 결국 강화도는 당시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이 방어에 소홀했던 탓에 공격이 시작된지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 들어 [[효종(조선)|효종]]과 [[숙종(조선)|숙종]] 대에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12진보(鎭堡)라 불리는 수많은 요새가 수축되었다. [[정조(조선)|정조]] 대에는 군사적인 중요도 때문에 [[수원화성|화성]], [[남한산성]], [[개성시|개성]]과 함께 유수부(留守府)로 지정하여,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도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 [[미국]] 같은 서양 세력이 있었다. 조선 말기 발발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외세를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외규장각]] 도서 약탈이 대표적인 사례. 결국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조선은 1876년 2월 27일 연무당[* 강화산성 서문 인근]에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망국으로 향하는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심도(沁都)'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심도중학교, 심도지구대 등에 이름이 남아 있다.] 구한말 조선군 편제 중, 강화도에 설치된 군영을 '심영(沁營)'이라 불렀다. == [[일제강점기]] == 1914년 [[일본 제국|일제]]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 때 교동군(喬桐郡)을 흡수 통합하였다. == 해방 이후 == 해방 이후 [[경기도]]에 잔류하였고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3월 1일에 [[검단(인천광역시)|검단]], [[옹진군]]과 더불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내무부 문서에 따르면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근거는 경제권과 생활권이 인천광역시와 연계된 상태이고 인천광역시에 진출한 강화군민들도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기도청보다 인천광역시청이 더 가깝다는 점도 편입의 근거가 되었다. 원래 계획은 김포시를 인천광역시에 편입하는 것인데 김포시는 검단면만 내주고 나머지는 경기도로 유지하면서 지금처럼 모호한 구역이 형성된 것. 결국 경기도는 [[대명항]]을 제외한 북단 해역을 완전히 봉쇄당한다. 남단도 옹진군의 상실로 많이 잃어버릴 뻔했지만 [[대부도]]와 [[화성시]], [[평택시]]가 있어서 완전하게 상실하지는 않았다. 사실 관리비에 비해 직접적인 수익이 적은 바다와 별도로 관리해주어야 하는 섬이 줄어드는 게 경기도에게도 나쁜 선택은 아닌지 경기도로 돌아가자는 안건이 나오기는 하나 주목받지 [[http://economy.hankooki.com/lpage/society/201112/e20111206112416120400.htm|못하고]]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649292|사라진다.]] 경기도청도 강화군의 경기도 환원에 대해선 적극적이진 않고 너희가 돌려준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강화군은 거리나 생활권이 인천광역시와는 거리가 멀다. 강화군의 생활권은 김포시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이지 인천광역시는 아니다. 인천광역시로 진출한 강화군민들이 있지만 영향력이 크지는 않다. 국회의원 선거구를 획정할 때마다 거리거 먼 지역과 붙는 등 이익이 없어서 경기도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다. [[분류:강화군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