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錫鎭 [[1907년]][* 1967년 간행된 [[http://db.history.go.kr/id/im_101_30027|대한민국인물연감(제2편)]]에는 1910년생으로 등재돼 있다.] [[12월 20일]] ~ [[1984년]] [[10월 29일]] (향년 76세)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동명그룹]]과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동명대학교]]), [[부산은행]]의 설립자다. 호는 동명(東明). 동향 기업인 성창기업 창업주 정태성과 더불어 부산, 더 나아가 한국 목재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도 손꼽힌다. == 일생 == 1907년 12월 21일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덕양동에서 아버지 강병우와 어머니 서순득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 때만 해도 수확량이 500섬을 웃돌 정도로 부유했으나,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강점기가 도래하여 가세가 기울었다. 거기에 소송까지 겹쳐 가난해졌다. 1923년 청도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서 생계를 위해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로 이주해 이곳에 본적을 두었으며, 그곳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구점에 취직해 [[목공]] 일로 기술을 연마했다. 이후 1925년 부산부 [[좌천동|좌천정]](現 [[부산광역시]] [[동구(부산)|동구]] [[좌천동]])에 '동명제재소'를 차려 기반을 다지고 1932년 1월 10일에는 부산부 좌천정 62번지에 [[합자회사]]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3_04_14_9030|동명양가구상점]]'을 차렸다. 1945년 부산부 [[범일동]](現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862번지에 합판공장을 차려 합판 사업에도 손을 댔고, 1949년 사명을 '동명목재상사'로 바꾼 뒤 사업을 확장했다. 1950년 6.25 전쟁 후에는 전후복구 사업의 활성화에 따라 호황기를 맞이했다. 그 와중에 공장 화재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난관을 맞이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59년부터 열대지방 원목인 나왕을 수입하여 1961년 국내 최초로 합판 제품을 수출했으며, 1963년 남구 용당동 123번지에 새 합판공장을 차렸다. 1974년에 자회사 동명산업을 시초로 1976년 동명수출포장 및 동명제지, 동성해운 등 여럿 계열사를 세워 [[동명그룹]]으로 성장시키는 한편, 1962~1964년까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및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직에 앉아 부산 경제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더 나아가 1967년 부산은행, 1973년 부산투자금융 등의 설립에도 협조했으며 1977년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을 세워서 이듬해 동원공업고등학교를 열어 육영사업에도 손을 벌렸다. 거기에 지역사회 공헌에도 열성을 보여 1963~1976년까지 (사)부산보호갱생위원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1964년 BBS부산연맹의 창설에 기여한 후 16년간 초대~8대 회장을 역임하며 불우 청소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971년부터 8년간 (사)부산불교신도회 회장을 지내며 1972년 진해 호국사와 금련사, 1977년 동명불원 등의 창건을 주도했다. 1979년에는 아들 강정남에게 사장직을 넘긴 뒤 육영사업에 더욱 집중했으나, 1978년 이후 불어닥친 원목가격 상승과 국내 건설경기 불황,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는 점차 악화됐다. 이에 강석진 자신이 경영 일선에서 복귀했으나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한 강제헌납으로 동명목재상사 등 재산을 빼앗겨 동명문화학원만 지켰으나, 1984년 10월 29일 오후 1시, [[부산직할시]] [[남구(부산)|남구]] [[남천동(부산)|남천동]] 57-2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410300009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10-30&officeId=00009&pageNo=1&printNo=5742&publishType=00020|숨을 거뒀다]]. 사후 유족들이 그룹을 찾으려 했다가 2002년에 패소당했으나,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그룹 해체를 신군부에 의한 강탈이라고 발표하면서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 가계도 == * 강병우 / 妻 서순득 * 3남 '''강석진''' 前 동명목재상사 회장 {{{-2 (1907 ~ 1984)}}} / 妻 고고화 * 1녀 강정자 {{{-2 (1930 ~ )}}} / 夫 장상문[* 동국제강그룹 창업주 [[장경호(기업인)|장경호]]의 2남.] 前 UN대표부 대사 {{{-2 (1922 ~ 1990)}}} * 1남 장세우 {{{-2 (1949 ~ 2010)}}} 前 도서출판 대원사 사장 * 1녀 장화경 {{{-2 (1955 ~ )}}} * 2녀 장현주 / 夫 추윤성 {{{-2 (1959 ~ )}}} * 2녀 강애자 {{{-2 (1937 ~ )}}} / 夫 [[배명인]] 제33대 법무부장관 {{{-2 (1932 ~ )}}} * 1남 강정남 제8~9대 동명문화학원 이사장 {{{-2 (1940 ~ )}}} / 妻 이관이 동명문화학원 상임이사 == 수상경력 == * 대통령표창 (1964, 1965, 1966, 1967(X3), 1971, 1972, 1974, 1977) * 산업포장 (1964) * 국민포장 (1965) * 동탑산업훈장 (1965) * 은탑산업훈장 (1966) * 금탑산업훈장 (1968) * 국무총리표창 (1969) == 여담 == * 그가 세워서 일궈왔던 [[동명대학교]]는 2008년 부산시의회, 부산은행, 부산상의 등과 공동으로 '동명대상'을 제정해 지역 사회에 공헌한 인물을 발굴해서 시상하고 있다. == 참고/관련 문헌 ==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009|아! 부산의 꿈, 동명목재. 그 숨결을 찾아서(김태현 글, 부산역사문화대전)]]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1705|부산역사문화대전 항목]] * [[http://tongmyong.tu.ac.kr/default/main/main.jsp|동명대학교 '동명 강석진 인터넷기념관']] *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kwd=%EB%8F%99%EB%AA%85+%EA%B0%95%EC%84%9D%EC%A7%84#viewKey=CNTS-00093215632&viewType=C&category=%EB%8F%84%EC%84%9C&pageIdx=1|동명 강석진: 그 생애와 사상]] - 동명문화연구원. 2003. [[분류:1907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청도군 출신 인물]][[분류:진주 강씨]][[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동명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