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강만선(姜晩善) || || '''생몰''' ||[[1872년]] ~ ? || || '''출생지''' ||[[경기도]] [[안성시]] || || '''사망지'''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지도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강만년은 [[1872년]]경 [[경기도]] [[안성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7년 7월 서울에서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해 회장 윤이병(尹履炳) 등이 주도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양위와 한일신협약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윤이병은 7월 19일 [[종로]]에서 남대문 정거장으로 가서 고종의 일본행을 저지하자고 대중 연설을 한 후, 군중을 이끌고 [[덕수궁 대한문]]과 [[덕수궁 포덕문|포덕문]]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경관들이 이를 저지하자,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얼마 후 고종의 일본행은 와전된 것이었지만 양위는 사실로 확인되자, 동우회원들은 다시 회관에 모여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는 모임을 이튿날 갖기로 결의했다. 7월 20일, 동우회원 및 민중 수천명이 석고단 앞에 모여 고종 양위 반대 시위를 전개하다가 매국 대신들을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결사대를 조직해 서소문 밖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방화, 소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투입되어 이들을 해산시키고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이때 강만선도 체포되었고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에서 내란 혐의로 유배형 10년을 선고받고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강만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성시 출신 인물]][[분류:187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