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20년/사건사고]][[분류:1921년/사건사고]][[분류:북양정부의 역사]][[분류:봉천군벌의 역사]][[분류:일제강점기/사건사고]][[분류:일본의 학살]] [[파일:external/farm.resources.ebs.co.kr/VOD_20120206_00223_THM.jpg]] [목차] == 개요 == ||[youtube(12_AJyTDE5U)]|| 간도 참변[* 間島慘變] 또는 경신 참변[* 庚申慘變]은 참변이 일어난 장소인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옌볜(延边)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 [[한국 한자음]]은 혼춘이지만 [[만주어]] hvncun에서 따 온 것이라 훈춘이라고 읽는다.]의 지명을 따서 훈춘 참변[* 琿春慘變]이라고도 부른다. == 상세 == ||[youtube(48UIOuiPwLg)]||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한국|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화민국 북양정부|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맹부덕의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교섭해 버려 독립군은 1920년 8월부터 [[지린성]]으로 떠났다.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뒤 일본군에겐 이미 독립군이 도주해서 토벌에 실패했다고 변명했다. 중국의 손을 빌려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일본은 아예 간도의 조선인들을 초토화시켜 버리기로 하고 8~9월에 계획을 수립해 25,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간도에 투입하였다. 마침 [[훈춘 사건]]이 발생하자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삼은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자기네 앞마당인 것처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피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이런 [[학살]]에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 [[박은식]], 독립 운동 지혈사]이 사망했고 한인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여담으로 [[청산리 전투]]는 이 간도 참변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에 벌어졌다. 북로 군정서군은 위의 중국군과의 교섭에 따라 근거지를 이동하여서 청산리에 집결했고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들의 추적을 피한 독립군들은 밀산부 한흥동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자유시 참변|참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도 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향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취재 도중 실종되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일제가 그를 [[암살]]하고 [[암매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82년작 [[한국 영화]] <일송정 푸른 솔>에서도 언급되는데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으나 학살당하는 한인들을 작두로 목을 친다든지 마을을 불태운다.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설정상 현직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가 간도 참변 당시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17사단의 지휘관이었기 때문. 주인공인 안옥윤이 회상 장면에서 간도참변 때 자신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언급하는데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차라리 권총으로 살해하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 칼로 찌르고, 불에 태우고, 생매장시키고, [[팽형|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약탈]], [[방화죄|방화]], [[구타]], [[고문]], [[강간]] 등 군대가 민간인에게 범할 수 있는 온갖 범죄가 함께 저질러졌음은 당연하다.] 간도에서 학살이 발생하기 전에 연해주에서도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해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 관련 문서 == * [[민생단 사건]] * [[미쓰야 협정]] * [[연해주 4월 참변]] * [[자유시 참변]] * [[훈춘 사건]] * [[만주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