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제국의 군인]] [[분류:1886년 출생]] [[분류:1965년 사망]] [[분류:도야마현 출신 인물]] [include(틀:일본군/장성급 장교)] ||||<#BC002D> {{{#FFC224 {{{+2 '''가와베 마사카즈''' [br] [ruby(, ruby=)] }}} }}} || || [[파일:카와이.jpg|width=100%]] || [[파일:external/forum.valka.cz/Kawabe_Masakazu.jpg|width=100%]] || || '''생몰년도''' || 1886.12.05 ~ 1965.03.02 (78세) || || '''최종계급''' || [[대장(계급)|대장]] || [목차] == 개요 == 일본군의 장성. == 행적 == [[무타구치 렌야]]와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임팔 작전]]을 승인했다. 이 멍청한 행동으로 일본군을 [[끔살]] 시킨다. 게다가 작전이 누가 봐도 완전히 실패한 뒤에도 체면 때문에 무타구치와 책임 떠넘기기를 하느라 철수가 늦어서 더더욱 많은 아군을 팀킬했다. 심지어 [[중일전쟁]]의 계기인 [[노구교 사건]] 당시에도 무타구치의 상관으로서 무타구치가 독단적으로 일으킨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묵인, 방조했다. 게다가 항공총군 사령관시절엔 '''제4항공군 사령관에 [[도미나가 교지]]'''를 임명시키라고 조언을 했던 전적까지 있었다. 1945년 12월 2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짧게나마 감옥살이를 한 무타구치와는 달리 완전하게 [[불기소처분|불기소]] 석방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린 무다구치 렌야와는 달리 그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에겐 아버지같은 존재로 불리웠고, 심지어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가와베 마사카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장례식 때 수많은 장병들과 부하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죽음의 철도]] 건설 당시 버마 방면군(緬甸方面軍)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가 [[임팔 작전]] 패전 직후인 1944년 8월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신규 부임한 [[기무라 헤이타로]]와 교체되고 일본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패전 이후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 방면군 포로학대의 책임을 지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당했으나 죽음의 철도 공사기간(1942년 9월~1943년 10월) 중 버마방면군 사령관은 가와베 마사카즈가 맞다. 가와베 마사카즈는 패전후 극동군사군사재판을 받았으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런 재판결과 때문에 리처드 마이니어(Richard Minear) [[매사추세츠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1970년대에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https://en.wikipedia.org/wiki/Victor%27s_justice|#]][[https://www.press.umich.edu/18285/victors_justice|#]]라는 책을 집필하여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부당함과 부실함을 비판하면서, 그 근거 중 하나로서 [[죽음의 철도]] 공사 당시 버마에 있지도 않았고 포로학대를 지시한 증거도 없는 [[기무라 헤이타로]]에게 버마에서의 포로학대혐의를 씌워 유죄 판결을 내린 반면, 당시 버마방면군 사령관이자 [[죽음의 철도]] 공사를 완공시킨 가와베 마사카즈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 나간 사실을 들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개전에 깊게 관여한 기무라를 죽이기 위해 덮어씌웠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