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89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히로시마시 출신 인물]][[분류: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분류: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일본 재무대신]][[분류:일본 법무대신]][[분류:정3위]] [include(틀:자유민주당(일본) 정무조사회장)] ||<-2> '''{{{+2 가야 오키노리}}}[br][ruby(賀屋興宣,ruby=かや おきのり)] | Okinori Kaya'''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Okinori_Kaya_01.jpg|width=100%]]}}} || ||<|2> '''출생''' ||[[1889년]] [[1월 30일]]|| ||[[일본 제국]]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2> '''사망''' ||[[1977년]] [[4월 28일]] (향년 88세) || ||[[일본]] [[도쿄도]]||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제국)]→[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직업''' ||정치인|| || '''정당''' ||[include(틀:자유민주당(일본) 녹색)]||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제국]]의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장대신[* 현재의 재무대신에 해당한다.]을 지내면서 전시 재정을 담당하였고, 전후 일본 우익의 대부(代父)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 생애 == 1889년 [[히로시마시]]에서 [[국학(일본)|국학]] 연구자였던 후지이 이쓰(藤井稜威)의 아들로 태어나 4살 무렵 큰외할아버지를 따라 성을 가야(賀屋)로 개칭하였다. [[도쿄제국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일본 재무성|대장성]]에서 주로 군부의 예산을 담당하는 업무를 진행하였다. 또한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와 192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등에 수행원으로 참석하는 등 혁신 관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에 의해 대장대신에 임명되었으며,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도 대장대신으로서 전시 재정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공채를 남발하여 모든 정부 예산을 군비 중심으로 책정하였고, 엔 블록(Yen Block)[* [[대동아공영권]]을 중심으로 일본 본토와 식민지(조선, 대만 등)를 엔화가 통용되는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만든 것]을 상정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앞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A급 [[전범]] 중 한 사람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5년 9월 가석방되었고, 1958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경제 고문과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법무대신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우익 강경파로 이름을 날렸다. 시간이 흘러 1972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5년이 흐른 1977년 도쿄에서 숨을 거두었다. == 여담 == 가야 오키노리는 [[기시 노부스케]]와 더불어 A급 전범 출신으로 정계 복귀를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이와 더불어 1971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야스쿠니 신사]] 내 A급 전범 합사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추진하였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https://news.v.daum.net/v/20050719054702783|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