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남송]]의 [[정치가]]이자 '''[[간신]]''' == [include(틀:송사)] [include(틀:남송 5대 권신)] ||<-2> {{{#ece5b6 '''{{{+1 남송의 권신[br]위국공(衛國公)[br]{{{+1 賈似道 | 가사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wenweipo.com/whb.jpg]]}}} || || '''{{{#fff 이름}}}''' ||가사도(賈似道)[* 현대 [[한어병음]]으로는 'Jiǎ Sìdào(자쓰다오)'.] || || '''{{{#fff 자}}}''' ||사헌(師憲) || || '''{{{#fff 공직기간}}}''' ||42년[* 음서를 통해 20살때 부터 관직을 받았다.] || || '''{{{#fff 최종직위}}}'''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추대^^ || || '''{{{#fff 정권 기간}}}''' ||16년 || || '''{{{#fff 작위}}}''' ||위국공(衛國公) || || '''{{{#fff 부친}}}''' ||[[가섭]](賈涉) || || '''{{{#fff 생몰}}}''' ||1213년 ~ 1275년(향년 62세) || || '''{{{#fff 사인}}}''' ||독살 || || '''[[주군|{{{#fff 주군}}}]]''' ||[[이종(송)|송이종]][br][[도종(송)|송도종]][br][[공종(송)|송공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 개요 === [[남송]]의 [[정치가]]이자 [[군인]]. 남송의 대표적인 [[권신]]이자 [[간신]]으로 악명이 높다. [[진회]]의 후배격인 인물인데 적어도 [[진회]]는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나 자신의 전공을 속이는 행동 따위는 하지않았다. 다만 최근에 그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그가 과연 간신이 맞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 한국어 관점에서 이름이 아주 쌈빡해서 가나다순으로 인물대백과사전 따위를 들추면 거의 첫 쪽에 나온다. [* 다만 이 분야의 일인자는 [[가가린]]이다.] ==== 생애 ==== 1213년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인 [[가섭]][* [[맹종정]], [[호재흥]]과 함께 항금명장 중 하나였고 회동 지역에서 금군을 막아냈으며, 산동의 충의군과 연계하여 중원 수복을 노리기도 했다.]은 전당현의 호씨라는 부녀자에게 눈독을 들였는데, 그녀를 납치해서 [[첩]]으로 만들었다. 그 호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가사도이다. 후일 가섭이 승진하자 그는 호씨를 버리고 가사도만 데려간다. 가섭은 1223년 가사도가 10살일 때 사망했고, 가사도의 친모인 호씨는 석장에게 재가한다.[* 나중에 가사도가 이를 빌미삼아 석장을 죽인다(...).] 그 뒤 가사도는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사암지에게서 비록 젊지만 그 재능은 매우 뛰어나서 국가를 위해 쓰일 것이라고 평가받았다고 한다. 당시 송나라 조정에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정이 하나 존재했는데 고위직이나 큰 공을 세운 관리의 자손에게는 일정한 관직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은음(恩蔭=[[음서]])이라 불렀으며 가사도도 이 은음을 통해 관직을 받기는 했으나 [[현]]의 양식창고를 담당하는 미관말직이었다. 하지만 1245년 명장 [[맹공]]이 암투병 도중 가사도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휘하인 [[이정지]][* 양회 전선에서 이단의 군대를 막고, 양양을 구원하고자 하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양주 지역에서 장렬한 전투를 벌인다.]에게 가사도를 소개한다. 이후 맹공은 남송의 황제 [[이종]]에게 가사도를 중용해 달라는 추천서를 보냈고 이종황제는 가사도를 바로 고위직인 감찰어사로 임명했다. 이후 맹공이 죽자 가사도는 맹공의 후임 경호제치사가 된다. 또한 가사도의 누이도 [[이종]]의 후궁이 되면서 가사도는 본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게다가 송대 고위관료의 필수요소인 예술품 수집광이기도 했기 때문에 예술품 덕후였던 [[이종]]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한다. 1259년(개경 원년) [[쿠빌라이]]의 군대가 남송을 침략한다. 조어성에서의 몽골군은 몽케 칸이 죽자 철수했지만 쿠빌라이의 군대는 악주를 공격했다. 이때 악주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악주에서 [[장승(남송)|장승]]이 이끄는 군대가 몽골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고 남송군 대부분은 사천 방면을 원조하고 있었다. [[여문신]][* 여문덕의 아우로, 1275년 원의 군대와 맞서다 죽었던 여문신과 동명이인이다.]은 몽골군의 장영실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승은 쿠빌라이에게 항복하겠다고 한 뒤, 쿠빌라이가 군대를 물리자 장승은 민가를 철거하는 등 성의 방어를 견고히 했다. 이후 [[고달(남송)|고달]]이 강릉에서 지원을 온 뒤 몽골군이 공격해 오지만, 역으로 고달이 계략으로 몽골군의 공언휘를 주살하는 등 악주에서 몽골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해 9월 28일 이종은 가사도를 우승상으로 삼아 악주를 구원하게 하였고, 중경에 있던 [[여문덕]]의 군대[* [[조어성 전투]] 때 조어성을 구하기 위해 조어성으로 향했으나, [[사천택]]에 의해 가로막혀 중경으로 되돌아왔다.]도 악주로 향하였다. 이날 이종은 가사도를 황주로 돌진시켜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는 7백 기수를 거느리고 [[손호신]], [[장세걸]], [[범문호]]를 대동하고 황주까지 진격시키는 데 성공하여, 송군은 사기를 크게 떨쳤다. 몽골군이 성을 에워싸는 동안 쿠빌라이는 [[장유]][* 장홍범의 아버지로, 1차 [[몽송전쟁]] 때 송군과 싸웠다.]의 군대로 하여금 거위차를 만들고 굴을 파서 입성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악주[* 오늘날 [[우한]]]에서 방어전을 총 지휘하였고, 악주로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악주는 남송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였다. 몽골군이 이 곳을 점령하면 남송을 동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악주는 서쪽으로는 사천, 북쪽으로는 경호 방면, 동쪽으로는 양회 전선을 지원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전에도 [[악비]]의 악가군이 중원을 회복하기 위해 이 곳에 주둔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와중에 쿠빌라이에게 재능을 칭찬받았을 정도였다.[* 하루아침에 악주성 주위에 목책을 쌓았다.] 그러나 성 내 사상자가 1만 3천에 달하였고 [[악주 전투]] 초기에 맹활약했던 장승이 전사하는 등 대부분 전황이 남송군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는지[* 하지만 몽골군도 역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그는 독단적으로 [[쿠빌라이 칸]]에게 군대를 물리면 공물을 바칠 것이라는 밀서를 보냈고 쿠빌라이는 [[몽케 칸]]이 합주 조어성[* 오늘날 충칭 허촨 구]을 공략하던 도중 병으로 급사하여 자신의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가 자신을 몰아내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사도와 [[밀약]]을 맺고 철수한다.[* 악주 화약에 대해서는 중국 측 사학자들도 논쟁이 많은데, 가사도가 화의를 제안하였고 가사도의 재능을 인정했던 쿠빌라이가 이를 수락했던 것인지 아니면 대칸 승계 문제로 철수해야 했던 쿠빌라이가 철군하는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기 위해 제시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고 한다.][* 진순신의 저서인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가사도가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고 쿠빌라이가 철군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게 하기 위해 수많은 골동품으로 가사도를 매수했다고 한다.] 가사도는 [[밀약]]대로 후퇴하는 쿠빌라이의 군대의 최후미 일부만 공격하는 시늉을 한 뒤[* 170개의 수급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자신이 악주에서 쿠빌라이를 격퇴하여 [[장강]]([[양쯔강]]) 일대의 몽골군을 몰아냈다고 부풀려 보고를 했는데, 송 이종은 가사도의 장계를 믿었고 수도에 입성하여 화려한 열병식 치루며 환대하였고 이후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며 칭송하며 그 공적으로 우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복화편"을 지어, 자신이 몽골군을 물리친 공을 칭송했다. 이후 12월에는 숙국공으로 봉해진다. 그 후 1261년에는 공전법을 시행하고, 태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송신같은 환관과 사씨 등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는 한편, 부패한 군인들을 처벌하는 타산법을 실행하는 등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가사도 자신이 [[악주 전투]]에서 부패한 장병들을 목격하였는지, 국경의 실태를 잘 파악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가사도가 실행한 개혁정책은 당시 지배층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어서 남송이 망한 뒤, 그들은 가사도를 졸장, 간신으로 매도했다.] 1261년 정권장악에 성공한 쿠빌라이가 사신을 보내 밀약에 따르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쿠빌라이를 물러내기 위한 가짜 약속이었던 만큼 그럴 생각이 없던 가사도가 [[학경]]을 그대로 억류하였다.[* 진주에 억류되었고, 학경은 가사도가 정가주에서 대패하는 1275년에 풀려나나 그 해 죽고 만다.][* 학경을 실질적으로 억류한 것은 나중에 원군과 장렬한 투쟁을 벌인 [[이정지]]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유정(원나라)|유정]]이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를 받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임명되자 이에 불안을 느끼고 노주를 바쳐 몽골 제국에 투항했음에도 아무 조치가 없었다. 1263년 권신 [[정대전]]이 실각될까봐 몽골 침공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결재를 올렸는데 이것이 수리되었고 영웅이었던 그는 바로 재상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국경 수비대장의 지위도 유지되어 문관/무관을 전부 장악해 더 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1264년 이종이 승하하고 [[송도종]]이 즉위했는데 도종은 전임황제보다 더 멍청한 인물이라서[* 기록을 보면 [[사마충]] 정도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사도는 이 황제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국정을 전횡했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문천상]]과 같은 정적이 될만한 인물을 괴롭혔으며 애첩들과 함께 [[귀뚜라미 싸움]]을 붙이며 놀기 좋아하는 등 여러 놀이를 즐겼다. 이후 몽골이 본격적으로 쳐들어왔음에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장수[* [[고달(남송)|고달]], [[이정지]] 등]에게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사실 가사도 본인도 원군을 보내기는 했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고, 무엇보다 가사도가 보냈던 [[범문호]]가 술만 마시고 여자들과 놀았으며, 이로 인해 이정지와 불화를 빚으며 입으로만 충성을 외치는 등 [[양양 공방전]]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그 전 이정지가 경호제치사로 임명되자, 전전부지휘사로 있었던 범문호 본인이 몽골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하였고, 가사도는 범문호에게 이정지의 명을 무시해도 좋다고 하였다.][* 또한 여문환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것을 꺼렸다. 여문환은 고달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황이 남송군에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여문환은 양양성에서 적을 잘 막고 있다고 허위 보고하였다.] 변방에서 급보가 전해지자 가사도는 송 도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북쪽의 적은 이미 퇴각한 지 오래이옵니다. 폐하께옵서는 이를 누구에게 들으셨사옵니까? 송 도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느 궁녀가 그리 이야기했소. 가사도는 그 궁녀를 죽였다. 양양 함락 후 게다가 악주까지 함락되는 데 이어 거기다가 장강 일대를 지키던 무장들 대다수[* 대부분이 여씨 문중이라, [[여문환]]을 본 것과 여문환의 권유로 투항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부 유튜버나 학자들은 이들이 여문환이 그렇게 지원을 외쳤으나 중앙정부가 이들을 버린 것에 대한 분노로 그냥 투항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튼 대표적인 인물이 [[여문덕]]의 아들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가 원에 투항하였고 이 투항한 이들이 맡던 지역 중 요충지였던 곳도 있었다. 이에 태학생들은 가사도가 전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가사도는 부득이하게 임안에 도독부를 설치했다. 그는 [[유정(원나라)|유정]]이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출전하기 꺼렸다. 그러나 유정이 죽자 출전에 나서게 되었다. 가사도는 이에 기뻐했다.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 그래서 표를 올려 출사하여 각지의 정예 병사를 불러모았는데, 금백의 치중을 실은 배는 머리와 꼬리가 100여 리에 달했다.안길에 도착하자, 가사도가 탄 배가 물보라에 좌초되었고, 유사용은 천 명을 이끌고 물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다른 배로 갈아타고 떠났다. 이후 무호에 이르러 송경을 사신으로 보내 바얀에게 거의 굴복에 가까운 화의를 요청하였으나, [[바린 바얀|바얀]]에게 거절당하고 몽골군과 맞서게 된다. 그는 손호신의 군대를 전방에 주둔시켰고, 자신은 [[하귀]]와 함께 후방에 주둔했다.[* 하귀는 [[정가주 전투]] 이전, 양라보에서 아술의 군대에게 패했고, 악주에서도 원나라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여기서 [[하귀]]는 합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여 소매 속에서 편서를 꺼내 가사도에게 보여주며 '송의 역사가 3백20년 만에 끝난다.'고 보여 주었고 가사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가주(丁家洲)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으나 가짜 전공으로 영웅이 되었던 가사도는 대참패하고 한방에 병력이 날아가, 남송의 최후가 사실상 결정되었다. 단, 송 멸망이 확정된 것은 이전 남송 최중요 전략거점이었던 [[양양 공방전]]에서 패배한 것이었다는 관점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의 주장대로 양양-번성 라인을 먹기만 하면 굳이 송이 막대한 재정을 투자해 구축한 방어라인을 진격할 이유도 없었고 더욱이 수도로 바로 진격이 가능하였기에 몽골제국군이 아무런 이유없이 제4차 [[양양 공방전]]에 무려 '''4년 반'''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공방을 벌였을 이유가 없다.] 전투 과정은 이렇다. 바얀이 남송군의 방어선이 견고한 것을 보고, 뗏목을 만들었다가 다시 태우는 등 송군의 방심을 유도했다. 남송군이 방심한 틈을 타 장강 양면에 군대를 배치하는 등 남송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원군이 포를 쏘고 또 심리전으로 송군을 혼란시키자, 이에 [[강재(남송)|강재]][* 나중에 이정지와 함께 순국하는 장수이다.]가 전열을 정비하고 싸우던 도중 원나라군의 지속되는 교란작전과 송나라 장수들의 도주로 완전 붕괴되었고[* 당시 원나라군은 '''"송군이 무너졌다!"'''라고 외치면서 남송군을 교란시켰고, 손호신이 자신의 애첩을 데리고 도망가는 등 자중지란이 계속되었다.], 가사도 본인은 군사들을 수습하지 못했다. 가사도의 군대가 하귀와 함께 노항에 주둔하던 중 2월 19일 밤 [[손호신]]이 송군의 패배를 보고하자, 가사도는 황급히 나타나 크게 외쳤다. >손호신이 패했다고? 그 뒤 하귀에게 의사 소집을 명하였다. 이후 손호신이 가사도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가슴을 치며 흐느꼈다. 그 뒤 하귀는 가사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서 어가를 보필하라고 한 뒤 회서 지역으로 도주했다. >손호신: 저의 병사들은 명령을 따르는 자가 단 한명도 없었사옵니다. >가사도: 이를 어떻게 해야 하오? >하귀:각 군이 이미 겁을 먹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당신은 양주에 가서 궤멸된 군사를 모집하고, 해상으로 황제를 보호하러 가십시오. 그래야 저는 회서를 사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사도는 손호신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양주로 달려갔다. 다음날 송나라의 패잔병이 강을 따라 내려가자 가사도는 사람을 해안으로 보내 깃발을 흔들며 그들을 불렀지만 패잔병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가사도를 욕한다. 가사도는 각 군에 격문을 보내 해상으로 가서 황제를 보호하게 하고 천도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각 군수는 모두 도망쳤고, 가사도는 양주로 들어갔다.[* [[정가주 전투]]에서 애첩을 데리고 도망간 손호신은 전투 이후 장세걸과 함께 원군과 싸웠고 그 해 9월 사망한다.] 결국 패전 뒤 강제로 조정에 소환된 다음, 승상 [[진의중]]이 탄핵을 주장하였고, 사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신들이 찬성을 하여 [[공종(송)|공종]]은 [[진의중]]의 탄핵결재를 받아들였다. 가사도는 파직되어 유배길에 오르던 도중 장주 목회암에 이르렀을 때 회계 현위 정호신에게 독살당했다. ==== 기타 ==== 시간이 흐르면서 [[재평가]] 시도가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 재정과 화폐제도를 정비하고, 부패한 군인과 관리들을 처벌하며 학자들을 등용하는 등 내정 면에서는 나름 괜찮은 성과를 냈다. 이 덕에 송나라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되려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것 때문에 후대에 간신으로 폄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개혁을 진행하면서 반대파 사대부들이나 지주 계층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결과적으로는 송이 멸망했으니 가사도를 싫어한 사대부들이 그를 음해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록을 나쁘게 했을 가능성이 한편에선 제기되고 있는데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남송 멸망 뒤, 가사도의 개혁으로 인해 피해를 본 관료들이 가사도를 악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타산법[* 부패한 군인들을 처벌했다.]으로 인해 피해를 본 남송 무장들 대다수가 가사도에게 반감을 가졌고, 이들은 대부분 원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것도 송 관료 [[스테레오타입]]? 하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찌질한 모습들로 볼 때에 실제로 도종 시대에 국가원수나 다를 바 없었던 그에게 송 멸망의 최종 책임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가 좀더 잘했더라도 남송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의 실책들이 남송의 멸망으로 직결된 이상 까일 만 하다. [[산둥 성]] [[웨이하이]]에 있는 간신경시관[* 가사도 이외에도, [[춘추전국시대]]의 간신 [[백비]], 도안고([[조씨고아]]의 악역.), [[진(영성)|진나라]]의 [[조고]], [[후한]]의 [[화흠]], [[수나라]]의 [[양소]], [[당나라]]의 내준신, [[송나라]]의 [[반미]], [[진회]], [[명나라]]의 [[엄숭]], [[청나라]]의 [[허션]], 민국시기의 [[왕징웨이]] 등 총 12명의 형상이 있다. 그러나 중국사를 보면 [[왕망]]이나 [[동탁]], [[이임보]]와 [[채경]], [[위충현]] 등 나라를 뒤흔든 더 심한 간신이나 역적들도 많은데다가 형상이 있는 인물 중 도안고는 고전소설 조씨고아에 나오는 실체 불분명한 인물이며 반미 역시 소설 [[양가장]]에서 부풀려진 악역이기에 선정 기준에서 의문이 생긴다. 또한 화흠은 정사에서는 청렴한 인물이었는데 [[삼국연의]]에서 악인으로 묘사되었다.]에 그의 형상이 전시되어 있다. 상술하였듯 [[귀뚜라미 싸움]]을 즐겼고, 이에《촉직경》을 지었는데, 이 책은 [[귀뚜라미]]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들어 있다. ==== 평가 ==== 송 이종이 가사도가 서호에서 노는 것을 보고, 사암지[* [[사숭지]]의 아우이다.]에게 이를 훈계하라고 하였으나, 사암지는 이렇게 답하였다. >가사도가 비록 소년 시절 풍류의 기질은 있사오나, 그 재능은 국가를 위해 크게 쓰일 것이옵니다. 그리고 맹공과 쿠빌라이에게는 평가가 좋았다. 먼저 송사 <맹공전>에 의하면 맹공이 죽기 한 해 전인 1245년 연강제치부사, 지강주 겸 강서안무사 가사도가 회서 지역에 성을 축조해 공적이 현저하고 명성을 드날렸다. 이를 들은 맹공에 의해 추천을 받았다. 그 뒤 맹공은 가사도를 송 이종에게 자신의 후임 경호제치사로 추천하였고 자기 수하인 [[이정지]]를 가사도에게 추천했다. 또한 1259년 벌어진 [[악주 전투]]에서는 가사도의 재능이 쿠빌라이에게도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사도는 악주에 도착하여 악주성 주위에 목책을 하루 만에 건설했다.] >나는 어찌하면 가사도 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쓸 수 있겠는가? >저 성을 지키는 자가 오직 가 제치 하나이니, 너는 십만 군중을 다 이길 수 없고, 사람 수를 다 죽이면 달도 뽑을 수 없으니, 너희들 죄가 어찌 남의 죄가 되겠느냐! 왕부지는 가사도를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채경(북송)|채경]], [[진회]], 가사도, [[사미원]]이 간사한 것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인 원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 후일 [[염희헌]]이 1259년 악주 전투를 회상할 당시 쿠빌라이 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폐하께옵서 악주를 공격할 때, 신료들에게 "나는 어찌하면 가사도 같은 자를 장수로 얻어 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사옵니다. 또한 자신이 탄압했던 [[문천상]]에게도 [[악주 전투]] 당시 용맹을 떨쳤던 모습을 칭찬받았다고 한다. >그 악주 전투에서는 어찌 용맹하였고, 노항의 도주는 어찌 슬픈가!(己未鄂州之战何勇也,鲁港之遁何哀也!) 진의중이 가사도를 처형하라고 하자 사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사도는 삼조[* 송 이종과 송 도종, 송 공제]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는데 어찌 일조의 죄로 대신을 대하는 예법을 잃으리오. 뒷날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항복한 무장들에게 "너희는 어찌 그리 쉽게 항복했느냐?"라고 묻자 이 무장들은 "가사도가 우리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가사도가 문인들을 중용하고, 저희들은 홀대하였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쿠빌라이 칸]]은 그들에게 "그래. 너희를 무시한 것은 가사도다. 송나라 황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너희는 송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구나. 가사도가 너희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라고 일침을 날렸다고 한다.[* 악주 전투에서 쿠빌라이에게 극찬받았던 것 덕분일 수도 있다. [[악주 전투]] 당시 가사도가 악주에서 쿠빌라이 군대를 모두 막아내었고, 쿠빌라이가 어떻게 하면 가사도 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삼을 수 있겠느냐면서 가사도를 극찬하였다.] --하지만 그 가사도가 활개칠 수 있었던 것도 송나라 황제 덕분이었다-- 이처럼 맹공이 죽기 1년 전 가사도가 자신의 후임 경호제치사[* 형호 방어를 주관하는 사령관 직책]로 추천받았던 것과, 쿠빌라이에게 악주 전투에서 그 재능을 칭찬받았던 것, 염희헌의 [[악주 전투]] 회상, 쿠빌라이가 가사도 때문에 투항했다고 하였던 남송 항장들에게 오히려 가사도를 치켜세웠던 것은 가사도가 선인은 아닐지라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 논란 === ==== 충간 ==== 가사도는 집권 후 대내적으로는 이기를 제거하여 국가와 백성들에게 재앙을 불러일으켰고 대외적으로는 전공을 속이고 비굴하게 굴다가 결국 남송을 망하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 정명겸은 가사도가 간신 취급을 받는 것은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간신]]이라는 죄를 덮어 씌운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집권 당시는 [[남송]]이 쇠퇴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가 집권하였을 당시 행하였던 정책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그가 집행하였던 공전법은 당시 지배층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였던 것이었고, 가사도는 그들에 의해 간신이라는 오명이 남게 되었다. 또한 가사도는 타산법을 실행하여 부패한 군인들을 처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장수들의 불만을 샀고 이 장수들은 나중에 원에 투항하고 말았다. 정명겸은 가사도에게 간신이라는 오명이 남은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며 역사의 오해'''라고 주장하였다. ==== 악주 화약 ==== 가사도의 최대 오점인 악주 화약에는 현재 사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사도가 군사에 관한 건 전혀 모르는 데다가 [[악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굴욕적으로 화의를 요청하였고, 몽골군이 후퇴한 뒤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약을 제안한 것은 숨기고 이를 승전했다고 허위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 사서에서는 가사도가 적극적인 싸움은 하지 않고 송경을 밀사로 보내 매년 세폐를 바치고, 장강을 국경으로 삼겠다는 등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제안을 하였고, 이후 1261년 [[학경]]이 악주 화약 이행을 요구하기 위해 남송으로 파견되나 진주에서 억류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역사계 주류에서는 악주 의화는 있었지만 끝내 체결되지 못하였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어떤 사학자는 악주 화약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고 악주 화약은 남송을 공격할 구실 및 여론을 조성하고, 남송을 이간질할 뿐 아니라 악주 전투 당시 몽골군의 책임을 벗어날 방책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사학자는 악주 화약을 허구라고 주장하는데, 몽골군이 악주를 전력으로 공격했으나 허사였고 쿠빌라이가 자신의 통치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퇴병한 이유를 남송의 타협으로 항복해 패배를 감추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 대중매체에서 === ==== 게임 ==== [[징기스칸 4]]에서도 등장. 남송을 대표하는 간신인데도 쓸데없이(?) 능력치가 뛰어나다. 정치 66, 전투 54, 지모 74에 병과적성은 보병, 궁병, 기병, 수군 순으로 각각 B, B, C, D다. [[삼국지 시리즈]]로 치면 '에이 이게 뭐야' 수준이지만 이 게임에서는 이만하면 B급 장수이며[* 삼국지 시리즈로 따지면 통솔 73 무력71, 지력 86, 정치 81 이 정도 수준에 해당된다.] 더욱이 문관형 인재가 많은 남송 장수진 가운데 병과 적성이 뛰어난 편이라 무작정 몰인정하게 대하기는 거시기하다. 그래도 남송은 문화치를 높이기가 쉬워서 가사도보다 좋은 가공장수들을 얼마든지 찍어낸다. 더욱이 플스판에서는 정치 71, 지모 84로 올라가서 사용이 더더욱 편하다.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나마 몽골군을 격퇴했고 행정 면에서는 나름 성과를 낸 만큼 꼭 부풀렸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서인지 전투 특기는 하나도 없다. 시나리오 1과 시나리오 2, 시나리오 3 모두 나오는데, 시나리오 2에서는 전형적인 [[간신배]] 역으로 나타나는 데다가 남송 최후의 재상인 [[문천상]], [[장세걸]]이라는 더 뛰어난 장수가 있어서 어느 만큼 푸대접하겠지만 특기로 [[농업]]과 [[건설]]이 있어서 내정에는 도움을 준다. 또한 지모를 써 [[간첩]]으로 써도 좋다. ==== 드라마 ==== 미드 [[마르코 폴로(드라마)|마르코 폴로]]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이종의 황후인 누이와 그 딸도 자기의 장기말로 생각하는 [[소시오패스]]이지만 카리스마적인 악당으로, 건장한 군인을 맨손으로 죽일 정도의 [[당랑권]]의 달인으로 나온다. 배우는 영화 [[다크 나이트(영화)|다크 나이트]]에서 [[마피아]]의 [[회계사]]로 출연한 진 한. == [[전라남도]] [[진도군]]에 속한 섬 == [include(틀:전라남도의 섬)] 가사도 (加沙島)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리에 속한 섬으로, 스님들이 입는 [[가사(의복)|가사]](加沙)와 섬 모양이 비슷하다고 가사도란 이름이 붙었다. 별다른 특징은 없지만 [[http://www.fnnews.com/news/201506021649195607|2012년 첫 에너지 자립섬으로 지정된 섬이기도 하며]], 금광과 고령토 광산이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저렴한 땅 중 하나이다. 1제곱미터당 약 150원. [[분류:송나라/인물]][[분류:아시아의 섭정]][[분류:타이저우시(저장성) 출신 인물]][[분류:서출]][[분류:1213년 출생]][[분류:1275년 사망]][[분류:다도해의 섬]][[분류:전라남도의 섬]][[분류:동음이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