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북한의 섬]][[분류:철산군]] [include(틀:세계의 섬들)] [include(틀:북한의 섬)] ||||<#000000><:>{{{#white {{{+3 가도 }}}}}}|| ||<-3><:> [include(틀:지도, 장소=북한 가도)] || [목차] {{{+2 椵[* 유자나무 가]島 / Ka Island}}} == 개요 ==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황해]]상에 위치한 섬. == 상세 == 현재 행정구역상 가도리이다.[* 이북5도청에서는 리 대신 동] 철산반도 본토와 2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 가까이에 [[탄도(동음이의어)|탄도]]가 있다. [[서한만|서한]][[다도해]](西韓多島海)의 섬들 중에서 [[선천군]]의 [[신미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섬이다. 일명 가죽나무섬이라고 하여 피도(皮島)라고도 하며, 면적 19.2km², 해안선의 길이는 42.94km이다. 최고봉인 연대봉(333m)을 비롯한 여러 개의 구릉지가 분포하며, [[소나무]]가 잘 자란다. 봄, 여름에 회유하는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여 좋은 어장을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가도장이라는 목장이 있어 감독관을 두고 말을 사육하였는데 목장의 둘레가 41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국군이 점령하였으나 휴전협정 체결 시 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북한에 양보하였다. == 여담 == [[이익(실학자)|이익]]의 [[성호사설|《성호사설》]]제2권 천지문(天地門)에는 가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도(椵島)는 가죽섬[皮島]이다. 가수(椵樹)란 우리 말의 [[가죽나무]]다. 지금은 삼화현(三和縣)에 속하며 50리 밖의 바닷 속에 있다. [[고려]] [[원종(고려)|원종]] 10년에 [[임연]]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연령(李延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 등이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목 아래 무리들을 모집하여 들어가서 섬의 병영을 점령하고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과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과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몽골|몽고]]에 가서 허위로 보고하기를, “고려에서 북계(北界) 모든 성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하였다. > >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 뒤에 왕이 복위하여 여러 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1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반환하고 탄은 처형하였다. > >이곳은 또 근세에 [[모문룡]]이 점령했던 땅이다. 고려 왕조부터 병영을 설치했다가 반란군들에게 점거된 곳이다. 지금 《여지승람》에는 그 전말을 기술했어야 할 터인데도 빠져 있기 때문에 일부러 수록한다. [[1622년]]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을 가도에 머물게 했는데, 그는 이곳에 진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고 이름짓고, 명군과 난민 1만여 명을 받아들여 이곳을 기지화 시켰다. 그는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고, [[명나라|명]]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후금]]의 후방을 교란한다. 결국 가도로부터 발생한 금의 후방 불안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112026001|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 == 관련항목 == 철산군에 속한 서한다도해의 섬들이다. * [[탄도]](炭島) * [[대화도]] * [[반성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