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키아게샤 (문단 편집) === 한국 출신 === * 나리타 유타카(成田豊, 1929-2011) - 일본 최대의 광고 기업인 [[덴츠]]의 전 회장으로 [[천안]] 출신이다. 다만 사람들에게 천안이 어딘지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서울]] 출신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란 배경 탓인지 [[한일관계]] 개선에 신경을 썼다. * [[도미시마 다케오]](富島健夫, 1931-1998) - 일본의 소설가. 그 유명한 ~~[[야설]]~~ <여인추억>의 작가이다. [[일제강점기]] [[경성부|경성]] 출생. * [[도조 유코]](東條由布子, 1939-2013) - [[도조 히데키]] 전 총리의 손녀. * 마에다 토시카즈(前田利一, 1921-2002) - 일본의 [[외교관]]. [[인천]]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부설 경성중학교[* [[광복]] 이후 경성중 건물을 미군정이 인수해 오늘날의 [[서울고등학교]]가 되었다.]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한일기본조약]]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의 통역관이었고,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주한일본대사를 지냈다.[* [[이계진]] 당시 아나운서가 쓴 책인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도시가스]]처럼 들릴 수 있어서, 이 사람이 나오는 뉴스에서는 '마에다 (주한일본)대사'라고 하면 그만인데도 장난삼아 일부러 이름까지 넣는 일도 있었다.] * [[망절]]일랑(網切一郞, 1942-2012) - 도간 망절씨의 시조. 일본식 이름은 아미키리 이치로. 경상남도 진해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건 망절 문서 참고. * [[에토 세이시로]](衛藤征士郎, 1941-) - 정치인. [[강진군]] 출신으로 패망 후 [[오이타현]]에서 자랐다. * [[오야부 하루히코]](大藪春彦, 1935-1996) - 일본의 소설가. [[야수는 죽어야한다]]의 저자. [[서울특별시|경성부]] 출생. * [[이토 토요오]](伊東 豊雄, 1941~) - [[일본]]의 건축가로, 2013년도 [[프리츠커상]] 수상자다. [[서울특별시|경성부]] 출신이다. * [[카지야마 토시유키]](樞山秀之, 1930-1975) - 일본의 ~~떡타지 기업물 에로~~ 소설가. 대표작으로 '[[족보(영화)|족보]]', '이조잔영'이 있다. [[서울특별시|경성부]] 출생. * [[즙간부]](辻幹夫) - 성진 즙씨의 시조. 일본식 이름은 츠지 미키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코바야시 치토세 (小林千登勢, 1937-2003) - 배우로 경성 출생. 자전소설인 [[별님의 레일]]이 1993년에 애니화되었다. * [[토츠카 요트 스쿨 사건|토츠카 히로시]](戸塚 宏) - 전직 요트 선수 및 자칭 교육전문가.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 * 후지이 히데토(藤井秀人(가명) 1930-2023)[* 일본 미야기 현 출생으로, 1945년 해방 당시 15살이라고 했으니 출생년도는 1930년도로 추정. 이후 행적은 한동안 미상이나 사망 직후 알려졌다. 1992년 경향신문 보도 당시 62세로 표기됨. 2023년 2월 13일 안타깝게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 1945년 해방 당시 가족과 함께 [[강원도]] [[춘천시]]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갈 길을 잃고[* 아마도 부모님이 조선으로 올때 일본에서 다 정리하고 온 듯 하다. 그래서 해방후 일본인들이 쫓겨나가는 와중에도 한국인 행세를 하며 어쩔 수 없이 계속 눌러 산 듯 하다.] '일본에서 막 귀국한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서울의 한 창고회사에서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는데,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전차를 타고 종로를 지나다가 [[조선인민군]]에 불법징집되어[* 전쟁중에 외국인은 징집하면 안된다.] 인민군 제5야영훈련소에 입대하였다. 훈련소에서 이름을 묻자 박념인(朴念仁)이라고 대답했다.[* 朴念仁은 한국어 이름으로 쓰기 발음이 상당히 어색한 말이긴 하나 뜻은 말이 된다. 생각이 어진 사람이라는 의미. 하지만 일본어로 벽창호(말이 적고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인민군에게는 일부러 한국인인 척 한 듯하다. 일본인은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당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본과 미국을 매우 싫어한다.] 인민군에서는 운수제4대대의 수송병으로 생활했다. 그러다 인민군 19사단 정찰대로 옮겨 황해북도 [[금천군]]에 배치받고 영국보병부대와의 전투로 부상을 입고 기절했다. 전투에서 낙오되어 황해북도 [[평산군|남천읍]]에서 포로가 돼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수용소에서 일본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당시 일제시대를 겪었기에 일본어를 학교에서 배웠으므로 당연히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기에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이상 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면서 일본인이라 주장해서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 받았을 듯 하다.] 대신 1953년 6월에 반공[[포로]]로 인정되어 3년만에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용소에서 풀려나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가는 도중에 이번엔 [[오토 웜비어|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는 체포조에게 체포되어 이번에는 한국군에 육군제2보충대에 편입되었다.]] 다음해 애국반공청년지원병에 대한 특별휴가를 받아 서울에 온 후 한국외무부에 귀국신청을 했다. 이 전후 사정을 받아들인 당시 [[대한민국]] [[외교부|외무부]]에서 귀국신청이 허가됐다는 통지를 받고 이를 근거로 제대할 수 있었다. 1년후 1955년 10월에 [[의가사 제대]]하여 일본에 돌아간 것은 56년 2월 3일이다.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오사카항에 내려 귀국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6250032912300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6-25&officeId=00032&pageNo=23&printNo=14446&publishType=00010|#]] ~~히키아게샤가 [[한군두]]까지~~ * [[히라타 아키히코]](平田昭彦, 1927-1984) - 경성 출생. [[영화]] <[[고지라(1954)|고지라]]>에서 [[세리자와 다이스케]] [[박사]]로 이름을 알린 [[배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