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선대원군 (문단 편집) == 개요 == > ⋯<전략>⋯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게 간언하기를,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대원군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랴." 했다. ⋯<후략>⋯ >----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상(上)[* 김태웅,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근대』, 가람기획, 2019, 30쪽]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손자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아버지.[* 고종은 [[조선/왕사|다음]] [[대한제국/황사|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조선/왕사|대통]]을 잇기 위해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법적 아버지는 익종인 [[효명세자]]이다.] [[조선시대]]에 4명[* [[국왕]]으로 추존받은 [[정원군]]을 제외하면 최종적으로는 3명.] 있었던 [[대원군]] 중 마지막 대원군이며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이었다. [[섭정]]으로 오랜기간 실권을 가졌고, 조선의 마지막 [[조선/왕사|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대한제국/황사|황제]]인 고종의 친아버지로서 조선 말기의 핵심 인물이다. 그런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져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고유명사]]처럼 지칭해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융희 원년)에 손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그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존|추숭]]하고 [[시호]] '헌의(獻懿)'를 내렸다. 그래서 이를 합친 최종 정식 작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 이를 두고 [[대원군]]도 [[조선/왕사|임금]]으로 격상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국가 원수(King)의 개념이 아니라 [[황제]]국에서 [[황족]]들에게 수여하는 작위(친왕, Prince)의 개념이다. 즉 왕국의 대원군과 제국의 대원왕은 실질적으로 똑같은 위치이기에 [[황제]] [[추존]]을 안 받은 이상 격상된 게 사실상 없으나 왕국의 왕에 준하는 예우와 존경을 받는다.]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생모인 [[여흥부대부인]]도 '여흥순목대원왕비(驪興純穆大院王妃)'로 [[추존|추숭]]받았다. [[한국]] [[근대사]]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풍운아로,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평가가 엇갈리는 한국 역사 속 인물들의 대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실제로도 한 쪽으로 단언하여 평가하기 매우 어렵다. 그의 인생 역정은 대단히 파란만장했으며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주요 사건에 많이 엮였으니 조선 말엽의 거시적인 역사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이 되는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언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