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흉노 (문단 편집) == 풍습 == 북아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말(동물)|말]], [[염소]], [[양(동물)|양]], [[당나귀]] 등을 주로 길렀고, 개중에는 [[낙타]] 같은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 시에는 목축,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기록된 것이 중국 측 기록. 그러나 정주민들에게서만 나오는 물산을 얻기 위해서 그저 교역이나 약탈로 얻는 것을 넘어서, 정주민, 주로 한나라 사람 그 자체를 대량으로 약탈해 자신의 영향권하에 두고 정주 생활을 하게 하면서 흉노에게 봉사하게 했다. 이것 역시 중국 측 기록에 나오며, 흉노 유적들에서 보이는 정주 흔적은 이렇게 흉노에 끌려와 하층민이 된 한족 정주민들의 유산으로 주로 해석한다. 현대 [[러시아]] 학자들이 발굴한 러시아 흉노 유적지에 농사, 축산을 한 듯한 일정한 주거지와 철기, [[청동]]을 생산한 [[대장간]] 흔적 등이 있다. 이는 흉노 후대의 유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형태로, 피지배계층이 농업과 공업을 하고, 지배계층은 목축과 수렵을 하는 체계를 수립한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가령 [[몽골]]은 [[청나라]] 시대에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서 [[몽골인]] 지주들이 나름 비옥한 토지들을 골라서 [[한족]] 출신의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맡기고, 지주 본인은 전통적인 목축업에 종사했다.[* 사족으로, 이게 쿠부치 사막의 직접적인 생성 원인이었다. 가뜩이나 척박한 땅에서 농사와 유목 생활을 병행하다보니, 빠르게 지력이 고갈되어 오늘날 [[서울특별시|서울]]의 5배에 달하는 면적의 거대한 [[사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더 이전 [[금나라]]에서는 맹안•모극제라 하여 [[한족]]과 [[발해]] 유민들에게는 대규모 농경 생활을 하게 하고, 지배층인 [[여진족]]에게는 반농반목 생활을 유지할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 역시도 초기에는 수렵을 병행하는 등 순수한 농업 위주의 정주문명은 아니었기에 어쨌든 농업을 주업으로 삼던 주변의 정주민들인 [[동예]], [[옥저]] 등을 정벌하여 조공을 받거나, [[후한]] 등의 여러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잡아온 [[한족]] 농민들을 농지에 투입시키는 식으로, 하층민들에게 농사를 시켰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 이건 초기에만 그랬던 것이고 제대로 된 농토를 얻으면서부터는 농업이 국가산업의 중심이 된다. 이후에는 유목국가들과는 달리 오히려 농경민이 우위를 차지하고 수렵민인 말갈족을 하층민으로 두는 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여튼 이는 유목민들 자신이 농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농업을 통해 얻은 곡식에서 주로 섭취할 수 있는 [[탄수화물]]을 얻고자 택한 방법이었다. 본래는 이를 위해 정주민들을 수시로 침공해서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 [[조공]]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조공의 형식만 빌린 무역이 아니라, 진짜로 삥뜯는 것을 말한다. [[병자호란]] 때 당했던 [[삼전도의 굴욕]]을 생각하면 쉽다.] 아예 대대적인 약탈을 하던 식이었는데, 이를 정주민들을 직접 자기들 땅에 정착시켜서 농사셔틀로 부리는 온건한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 흉노의 귀족들은 난제(攣鞮), 수복(須卜), 구림(丘林), 혁련(赫連), 호연(呼延) 등 성씨를 사용했다고 한다. 흉노 사회에서는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비교적 천대받았다. 예컨대, 식사를 할 때에도 맛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먼저 먹었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고 한다. 《사기》 <흉노 열전> 부분에서 나오는 중항열과 한나라 사신의 대화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사신은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면서 왜 장정들이 맛있는 걸 먼저 먹고 남은 걸 노인에게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중항열은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하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싸울 수가 없어 젊고 힘센 장정들이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고 나아가 노인들을 지켜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 이는 [[스파르타]]와도 대조되는데 둘 다 전투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는 노인을 공경했다. 이쪽에서 노인은 오랜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 이러한 차이는 [[스파르타]]는 농경국가였고 흉노는 유목국가였기 때문일 수 있다. 스파르타는 노인에게까지 음식이 돌아갈 정도로 음식이 나는 데다가 속국인 [[메세니아]]를 정복해 거기서 나오는 식량까지 얻을 수 있던 반면, 흉노는 그러질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당연히 생모는 제외된다. 이는 대부분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제도이다. 과거 [[고구려]]도 [[형사취수제]]라 하여 형이 죽으면 그 부인을 동생이 데리고 사는 풍습이 있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려는 사회적 의무이고 게르만을 포함한[* 카이사르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 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난다. 역시 유목민족 느낌이 강했던 진(秦)나라에서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가 처첩을 공유했다고 한다. 나중에 상앙이 자뻑 드립할 때 언급된다. 유동성이 강한 현재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에서도 형제의 처첩 공유는 흔했다.[* 형사취수제나 수첩제는 사망자의 유가족을 부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가임 여성의 임신 기회를 놓치거나 가임 여성이 가족(씨족) 바깥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본래 생식 가능한 남자에 비해 생식 가능한 여성의 수는 적을 수 밖에 없고, 일부다처제가 성립하는 사회에서는 가임기 여성을 힘있는 남성이 독점할 확률이 높다. 하물며 유목사회에서는 다른 혼인 상대를 쉽게 찾을 만큼 인구가 많지도 않다. 따라서 이미 씨족 내부로 들어온 여성을 내보내기란 남자 쪽에선 생식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는 행위나 다름없으므로 형사취수제 같은 제도가 생겨났던 것. 과부를 내보내고 새 신부를 들여서 신랑이 [[지참금]]을 이중으로 지출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장]]'당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에서 수천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 [[금]]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쌓지는 않았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 땐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에 [[혈액|피]]를 흘리는 '이면'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 묻는 '전발' 풍습도 있었다. 이 풍습은 순장을 억제하여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가 아닐 때 [[도검|칼]]을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했고,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의 고서뿐이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긴 하다. 실제 발굴된 흉노의 유적은 중국 측 기록과 다른 점도 있었다. 중국 전통 악기인 [[얼후]]가 이 흉노에서 기원하였다. 본래 흉노의 악기였던 [[호치르]]가 8세기 때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얼후란 이름이 붙여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