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흉노 (문단 편집) === 중국과의 관계 === 《[[산해경]]》에 따르면 흉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이계]]의 자손이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게다가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 ~~판타지~~ 소설에 가까워서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다. 사마천은 《산해경》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면서 판단을 유보했지만, 정작 그런 사마천도 《[[사기(역사책)|사기]]》에서 흉노의 선조는 [[우(하나라)|하후씨(夏后氏)]]의 후예(苗裔)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상술한 바처럼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갖다붙이기라는 견해가 강하다.[* 사실 고대엔 이런 갖다붙이기가 흔해서 그리스 신화만 봐도 테티스의 아들 [[나일 강|닐로스]]의 딸 [[멤피스]]의 딸 [[리비아]]의 손자 [[이집트|아이굽토스]]와 [[페니키아|포이닉스]]... 하는 식으로 족보가 엮이고, 로마인들과 프랑크인들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그 주변 민족들도 《일리아스》에 나오는 모 씨가 서쪽 모처에 정착해서 자국을 세웠다는 식이었다. 지금도 아라비아 씨족들은 족보가 [[아담]]까지 올라간다. 이는 고대 세계관의 문화권력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자고로 이웃들과 교류하려면 먼저 정체를 밝혀야 하는 법이다. 여기서 자기만 남들과 다른 종류의 세계관을 따른다면 낯선 이방인, 곧 [[아싸]]가 될 테니 주변에 맞춰 족보를 손볼 수밖에 없다. 주류 문화권 입장에서도 여태 우주부터 인간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온 자기네 세계관이 한낱 변두리 촌놈들 앞에서 데꿀멍하도록 놔둘 수는 없을 테고. 비록 중국 사마천이 갖다붙이긴 했지만, 흉노 역시 공식 세계관에 맞춘 [[동인설정]]을 지어주는 것이 고대인 기준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 막말로 중국 입장에서도 어디서 굴러온건지도 모를 듣보잡에게 졌다는 것보다는 하나라 후손에게 졌다는 것이 그나마 덜 쪽팔렸을 것이다.] 한국의 김병준 교수는 특이한 설을 제시했는데, 흉노가 원래는 중국에 살던 민족 중 하나였으나 점차 북방으로 이주하면서 정주문화를 버리고 유목문화로 갈아탔고 《사기》의 기록은 그런 정황을 신화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사에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 《설원》(說苑)에 따르면 기원전 312년 누번의 영토에 거주하는 흉노가 급습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만 이 정보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북방의 [[조나라|조(趙)나라]]를 꾸준히 괴롭히다가, 그만 [[이목(전국시대)|이목]]의 기만책에 낚여서 처절하게 발려버린 기록이 있다. 이때 자그마치 '''10만명'''이 죽고[* 그때 당시 10만 명이면 매우 큰 수치였다.] 선우는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이목도 이목이지만 10만 명이나 모여있던 흉노도 대단하다. 물론 중국 사서의 특성상 ~~주최 측 추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이건 고대 서양도 마찬가지라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5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어쨌든 이 한 판으로 흉노의 조직은 거진 와해된 셈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무리들은 서쪽 [[오르도스]] 지방[* 티베트 고원에서 내려온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곡류하면서 만드는 중간지대. 그 때문에 '''하투'''(河套)라고도 하고, '''하남'''(河南)이라고도 한다. 중국 한복판의 하남성과는 다르다.]에 모여 살면서 [[진(통일왕조)#s-1.2|진(秦)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명을 받은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 밀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황하 밖으로 오르도스를 빙 둘러서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오르도스 확보와 만리장성 축조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자원을 소모하여 결국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흉노의 약화라는 목적만은 달성할 수 있었다. 시황제 아래에선 찍소리도 못 하고 지내던 흉노였지만 진말의 농민봉기에 이은 초한전쟁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이룬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묵돌]]선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고제(전한)|유방]]이 [[전한]]을 세우고 나서부터이다. [[고제(전한)|한고제 유방]]은 기세 좋게 토벌에 나섰지만 [[백등산 포위전|그야말로 캐관광]]. 흉노는 유방의 조심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유방의 [[보병]]을 유인한 뒤 [[기병]] 포위전략을 써서 유방을 떡발랐다. [[진평]]의 계략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결국 패배는 패배. 전한은 흉노에게 한나라 여인을 선우의 아내로 바치고, 그 외 각종 물자와 인력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약을 맺게 된다. 그나마 [[북송]]은 [[거란]]의 [[요나라]][[전연의 맹|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때]] 송나라 쪽이 [[형]] 역할을 맡아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이 화약의 경우엔 한나라 쪽이 동생이었다. 나중엔 [[고황후 여씨|여후]]에게 [[묵돌|묵돌 선우]]가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나도 외로우니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 결합해 나와 혼인하는 게 어떻겠소''' 같은 식의 무례한 편지를 보내도 [[초한전쟁|진나라 말기부터의 전쟁과]] [[항우]]가 벌인 수많은 학살 때문에 인구 수든 생산량이든 뚝 떨어져서 장수들도 말이 없어 소를 타고 다니는 상황이었기에 토벌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여후와 중신들은 진노했고 [[번쾌]]가 10만의 군사를 요청했지만, [[계포]]가 "번쾌는 10만의 군사로 고제가 40만으로도 못한 걸 하겠다는 망발을 하니 참해야 합니다."라는 직언을 올렸고 없던 일이 되었다.] 그 뒤로 평소엔 평화유지비 받아먹고 먹을 거 떨어지면 국경을 두들겨대다가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한무제에게 된통 걸려서 너 죽고 나 죽자로 싸우게 되었는데, '''[[막북전투|수십 년간 지든 이기든 10만 명 이상씩 계속 초원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쇼미더머니 소모전]]'''에 밀려 결국 선우정이 막북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래도 세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나라의 총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내 민족 자체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세력은 쪼개지고 황하 상류 서쪽의 4군(무위·장액·[[주취안|주천]]·[[돈황]])을 잃으면서 서역과 실크로드 무역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이후 한나라를 약탈하는 게 잘 되지 않으니 대신 [[오손]]을 공격했다가 [[선제(전한)|한 선제]]가 오손과 손잡고 무제 사후 오랜만에 2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니, 흉노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나다가 수만 명씩 죽어나가는 참혹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나중에는 흉노가 이 꼬라지가 된 걸 본 오손, 오환, 정령 등 흉노에 복속되어 있던 민족들이 전부 들고 일어났다. 이때 흉노는 진압하지 못하고 그들에게까지 거꾸로 두들겨맞는 [[동네북]]이 되었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한나라가 흉노에 기병을 보내 흉노인을 약탈하는(!)~~주체와 객체가 바뀐 것 같다면 착각이다~~ 일까지 벌어졌다. 적어도 두만 때부터 흉노는 장자 세습의 원칙을 이어갔으나, 한 무제와의 대전 중에 군신선우가 죽자 급했는지 병약한 장자 어단 대신 군신선우의 동생 이지사를 선우로 세웠고, 이후 이지사의 후손들이 일찍 죽어나가 장자 세습의 원칙을 더 견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선우위를 놓고 내부에서 궁정 암투가 극심해지며 선우의 정통성도 점차 결여되었고, 결국 한 무제의 손자인 선제 때에 이르자 후계 구도가 막장으로 치달아 한때는 '''선우를 일컫는 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 혼란상에 빠져들었다'''.~~다섯 선우의 해, 세 선우의 해~~ 그중 [[호한야]]가 겨우 대충 아우르나 싶더니 그전까지는 조용하던 형 질지가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호한야를 두들겨 내쫓았다. 궁지에 몰린 호한야는 한나라에게 칭신하고, 질지 역시 한나라와 잘 지내려고는 했지만 서로 대등한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한나라는 호한야의 편을 들었다. 고립된 질지는 서쪽으로 활로를 찾으니 '''호한야의 세력은 동흉노, 질지의 세력은 서흉노가 되었다'''. 서흉노는 강거로 가서 서역의 패권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한군의 토벌로 멸망하였다. 그 잔존세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재. 후한대에 이르러서 다시 선우위 계승 문제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북흉노는 그후 여러 번 국경을 침범하다가 후한 [[명제(후한)|명제]]~[[화제(후한)|화제]] 때 [[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후한)|화제]] 때 두헌(竇憲)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털린 후 151년 이오(伊吾)를 공격하다 실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장 일대에서 완전히 그 세력을 잃는다. 그 후 4세기 엄채국[* 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했던 이란계 유목민족.]을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6세기경 《[[수서]]》에서 수나라가 다시 서역으로 진출해 동로마까지 기록에 남기지만 흉노는 없는 걸로 보아 시베리아로 튀었거나 망했거나. 현재로서는 추측할 단서가 없다.] 이후 후한은 남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남흉노는 사실상 후한에게 복속된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후한이 남흉노인들을 관내로 집단 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흉노의 명목상 [[선우]] 직위는 계속 유지되어왔는데 건안 16년(216) [[조조]]가 흉노 부락을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帥)'''를 선발해 통솔시키며 수 아래 한인의 '''사마(司馬)'''를 두어 감시하고, 5부 전체는 '''사흉노중랑장'''[* 흉노를 총괄하는 중랑장 자체는 후한이 들어선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 명칭이 확실히 드러난 것은 영제 시기 장환으로, 호흉노중랑장에 임명되어 흉노 반란군과 오환, 선비의 연합군을 격퇴한 것에서 발견된다. 여담으로 이때 장환의 부장으로 종군한 것이 동탁이었다.]이 감시하게 했다. 중랑장은 태원(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했고,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므로 흉노 전체가 노예 상태가 된 것이었다.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에는 [[위(삼국시대)|조위]]-[[서진]]의 지배를 받았으며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에서도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다시 흥기한 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인한 혼란 때문으로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으며 5호 16국시대에 한(漢),[* 흉노족인 [[유연]](劉淵)이 흉노와 형제의 관계였던 후한이 멸망했으니 그 전통을 형인 흉노가 잇겠다며 국호를 '한'이라 했고, 실제로 한나라의 역대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전조]](前趙), [[북량]](北凉), [[북하]](北夏)[* '호하', '혁련하' 등으로 불리는 국가로 역사상 마지막 흉노 국가임을 내세운 대표 국가였다. 결국 선비족의 북위에게 멸망했다.] 등의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탁발[[선비족]]이 중심이 된 [[북위]]가 흉노계 호한체제 국가들을 멸망시키면서 흉노의 명맥은 완전히 사라졌다. [[독고부]] 등 몇몇 후세 인물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관롱집단]]의 대명사로 유명한 [[문제(수)|수 문제]] 양견의 부인 독고씨는 흉노의 후예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