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휘종(송) (문단 편집) === [[정강의 변]] === 이를 알게되어 분노한 [[금태종]]이 군대를 파견하자 휘종은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 당시 휘종은 수도가 함락되면 자신이 다시 제위에 복귀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송흠종|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휘종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휘종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며 연회를 즐기고 후궁들과 어울리는 등 평상시와 같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금군이 물러가자 마자 주전파 신료들이 일제히 강화 반대를 외치자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흠종은 주전파 신료들의 의견을 덜컥 수용해버렸고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 송나라를 침공했다. 그리고 금나라한테 박살나고 수도 함락 직전까지 몰린 송나라의 군사력이[* 송나라 군대가 문치주의 영향으로 약한 것도 있지만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정예군을 많이 소모한터라 가뜩이나 약한 송의 군사력이 더욱 약화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휘종이 국가재정을 파탄내어 송은 병력과 자원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복구될 리는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금군한테 깨끗하게 갈려나가고 뒤이어 개봉마저 함락당하고 만다. 개봉에는 수비군으로 금군(禁軍) 3만 명이 있었지만 문제는 금군조차 형편없다보니 금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방비하기는 커녕 대부분이 도망간터라 개봉이 금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정확히는 송휘종이 국가재정을 파탄내어 군사력 강화시킬 방도가 없었다. 이때 피신하지 못한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혀 황후, 후비, 황자, 황녀, 친왕, 왕비 등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녘의 금나라 영토로 끌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정강의 변]] 문서로. [youtube(9SZ9XELcvO4)]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휘종과 흠종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종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 [[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서진]] 시대 [[영가의 난]]처럼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http://pure11004.blog.me/120051459778|#]] 휘종의 아내들을 비롯한 많은 황족 여성들은 세의원(洗衣院)[* 원래는 빨래방을 말한다. 빨래는 찬물에 옷감을 박박 문대야하는 고된 작업이고, 중국 왕조에서는 왕의 총애를 잃거나 잘못을 범한 여성들을 벌주는데 제격이었기 때문에 이런 벌칙을 받곤 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의원은 금군 병사들이 즐기는 위안소, 일제의 종군위안부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황족여성들은 위안부로 사용되었다.]으로 보내졌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태종(송)|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기에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사실 금으로 끌려가면서 휘종은 '[[기생]] [[이사사]]와 함께 끌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기생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말을 주절대는 꼬락서니가 금에서 보기에는 혼덕공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휘종 때문에 북송이 망했다는 주장도 사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그를 금나라로 끌고 갈 때 한 백성이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은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 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했다. 거기에 도중에 쉬는 도중 술을 마시던 대장이 흠종의 황후 주씨에게 술을 따르도록 권했고 주씨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때 한 대신이 '''금나라 놈들은 인면 수심의 [[인간말종]]이다!'''라고 부르짖다가 끌려나가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본 금나라인들은 "요가 망할 때는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이가 그래도 족히 10명은 되었는데, 송이 망한 지금은 의를 위해 죽는 자가 '''저 사람 단 한 명뿐이구나!'''" 라고 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송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인재들 중 많은 이들이 남쪽으로 탈출하여 [[남송]]에서 금과 계속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요 역시 이때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고 후계 왕조인 [[서요]]를 세우기는 했다. 다만 '중국사의 중심부'에서 각축전을 벌이던 요나라 vs 송나라에 비해 서요의 위치는 중국사의 영역인가 [[중앙아시아]]사의 영역인가 좀 애매한 편이기도 하고, [[요나라]] 문서의 지도와 [[서요]] 문서의 지도를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영토의 북쪽 절반을 잃었지만 본래 영토의 남쪽 절반을 유지하고 버틴 [[송나라]]에 비해 서요는 아예 멀리 서쪽으로 이주해서 새로 세운 국가에 가까운 면이 있다. (초원 유목민의 영토 개념을 그리 빡빡히 따질 것은 아니라지만 아예 영향권 자체가 거의 안 겹친다.) 세계사의 다른 사례와 비교하자면 [[우마이야 왕조]]→[[후우마이야 왕조]]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그러니까 요→서요 계승성을 부정하자면 '같은 왕조 구성원이 세운 새 나라지 요나라 자체의 후계국가라긴 좀 애매하지 않으냐? 고 말할수도 있고, 인정하자면 '같은 왕조가 세운 새 나라면 그게 바로 후계국가 아니냐? 애초에 요나라로부터 축적된 문화적, 세력적 기반을 활용할 수 없었으면 [[야율대석]]이 어떻게 먼 땅의 투르크족을 규합하고 복속시켰겠느냐?' 식으로도 말할 수 있는 문제가 되니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당대 금나라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동부 유목제국의 최강자이던 요나라를 격파한데 이어 중화제국 송나라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그 영토의 절반을 단숨에 빼앗았으니 엄청난 승리감을 만끽함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남송은 이후 150년이나 더 버텼다. 심지어 북송을 무너트린 금나라는 반 세기쯤 먼저 멸망하고 말았으니, 후세인의 눈으로 보자면 금나라 사람들이 송나라를 조롱하던 모습이야말로 섣부른 설레발이었다.[* 다만 금나라는 오래 못간건 운이 나쁜 것도 있었다. 요나라는 요성종 사후 서서히 쇠퇴하긴 했지만 그래도 100년 가까이 버텼는데 이는 요나라를 몰락시키는 여진족(금나라)가 딱 이 시기에 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나라는 금태종 시기에 이미 몽골 초원에서 카마그 몽골이 일어나 금나라 후방을 위협했고 해릉양왕 시기에 카마그 몽골을 박살내는데 성공했으나 50여년 뒤 '''[[칭기즈 칸]]'''이라는 희대의 정복자가 나오는 바람에 박살이 났다. 여기다가 요나라와 북송은 도망칠 곳이라도 있었지만 금나라는 도망칠 길도 없었다. 기껏해야 남쪽으로 천도하여 도망쳤지만 결과적으로 몽골과 남송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고 남송처럼 장강~사천의 자연국경이 있던 것도 아니다. 여기다가 금나라는 요나라와는 달리 장강 이북을 차지하다보니 민족적으로 한족이 너무 많아졌고 또 깊숙히 들어오다 보니 여진족의 한족화 문제에 또한 멸망한 요나라의 거란족과의 불화, 취약한 경제력 등 여러모로 결함이 많은 나라였다.] 또한 나라가 망할 때 그 나라를 위해 죽는 사람들을 '의를 위해 죽은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남송이 멸망한 [[애산 전투]]에서는 흔히 <송말삼걸>이라 부르는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의 세 네임드를 시작으로 나라와 함께 죽겠다는 이들이 20만 명이나 나서서 그중 10만 명이 전사했으니 의인 10만 명이라고 해야 한다. 송태조 조광윤이 (제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특히 우대하라고 지시한 시씨 가문의 종손을 비롯하여 송나라가 300여 년간 우대하며 양성한 선비(사대부) 중 수많은 이들도 멸망하는 나라의 마지막 싸움에 참여하여 나라와 최후를 함께했던 것. 나라가 멸망할 때 목숨을 걸고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가 그 나라의 격을 판단하는 요소라면, 세계사를 통틀어도 송나라 멸망만한 비장미를 보여준 망국의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송의 멸망에 얽힌 요나 금, 이들을 모두 멸망시킨 원나라 모두 송나라처럼 비장하게 망국의 길을 걷지는 못하였다. 그렇다면 왜 북송이 무너질 땐 그런 의인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는 송나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던 시기에 임금인 송휘종이 요의 [[천조제]]는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워낙 한심한 암군이었기에 그런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봄이 적절할것이다. 세상에 대체 누가 나라를 말아먹고 포로로 잡혀가면서도 기생이나 찾는 한심한 작자를 위해 죽어주고 싶겠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