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독 (문단 편집) ===== 조선 ===== [[조선]]시대의 [[이두]] 문헌에서도 '[[爲]]'를 '[[하다|ᄒᆞ]]'로 읽는 등 훈독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 전 한국어 표기]]〉를 참고하면 훈독자와 훈가자의 예를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로는 굳이 훈독을 이용하지 않아도 고유어 표기가 가능해졌지만, 차자 표기 등 훈독 문서들이 다수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훈독이 상당히 많이 통용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잘 알려져 있는 사례로, [[훈몽자회]]를 지었을 때 글자 하나하나에 [[음차]]를 했는데, 'ㄱ'의 '윽'은 한자음이 비슷한 役(부릴 역)을 사용했으나 'ㄷ'과 'ㅅ'의 '읃'과 '읏'은 한자음이 비슷한 한자조차 없어서 훈독을 이용했다. '디귿'은 '池末', '시옷'은 '時衣'. '끝 말(末)'의 훈 '귿(→끝)'을, '옷 의(衣)'의 훈 '옷'을 따온 예가 보이고, 당시 초성에만 쓰였던 8개 자음자 중 하나인 'ㅋ'의 '키'를 표기하기 위해 '키 기(箕)'의 훈 '키'를 따온 예가 보이는데, '末'과 '衣', '箕'에 동그라미를 붙인 것을 보아 한글을 훈독의 보조 표기로 사용하는 문화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한글의 등장 이후 16세기까지의 문서들에는 훈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들이 여럿 등장하나, 17세기부터는 그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주된 이유는 한글을 이용하는 계층이 변화한 것이다. 15세기에는 국가 사업으로 한글 보급이 이뤄지며 조정 관료들에 의해 교육용으로 한글 문서가 작성된 경우가 많았고, 16세기에도 양반 사대부들이 한글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즉, 16세기까지는 한글도 주로 식자층인 양반 남성들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한문[* 한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훈독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이나 이두 등 기존의 훈독 문화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이들을 일상 언어 생활에서도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글을 이용하면서도 한자 훈독을 섞어서 쓰곤 했다. 하지만 17세기로 넘어가며 한글의 주 이용자가 양반 및 중인 가문의 여성들 및 여유가 있는 일부 상류층 평민들로 넘어갔는데, 이들은 한자 훈독에 대한 이해도나 친숙도가 양반 사대부들에 비해 상당히 낮았으며 한자 자체에 대한 지식도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한자 훈독이 활용된 문서를 적는 경우가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해 드물었다. 그리고 이런 상류층 여성들의 한글 문서 작성 방식이 시대가 지나며 대세가 되었는데, 이는 양반들이나 중인들도 한글 문서에 있어서는 한글의 주 이용자들인 이들의 한글 문서 작성 방식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대비전이나 중궁전에서 나오는 문서들부터가 이런 한글 문서들의 비중이 제법 높았고, 어머니나 아내나 딸 등 여성인 가족 구성원과도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아야 했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 남성들도 적어도 한글 문서는 여성들이 쓰는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양반가 여성들의 한글 문서 작성 방식이 사실상 표준 한글 문서 작성 방식이 된 것이다. 때문에 중세 한국어에서 근대 한국어로 이행이 이뤄지는 17세기부터는 한글 문서에서 한자어와 고유어의 구분이 명확해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유어를 한글로 적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으며, 더 나아가 한자어까지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가 늘며 순한글로 작성된 문서의 비중 또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글로 작성된 문서들에서 훈독의 비중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를 지나면서 훈독의 전통이 서서히 약해짐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단지 한자로 표기되었다는 이유로 고유어 지명들이 싸그리 음독으로 읽히면서 한자어 지명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음독화 변화는 전국 단위 행정체계가 정비되고 지명의 차자표기가 본격화된 조선조 내내 진행되기는 하였지만, 대한제국 시기 근대적 행정체계에 맞춰 행정 구역을 개편할 당시 행정상의 지명 표기가 한자 표기를 기준으로 정해지며 본격화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기를 지나면서 이는 고착화되었는데,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한제국 시기 공식 표기로 지정된 한자어 지명의 음독 지명이 지도와 행정문서에 실렸고 고유어 지명은 괄호나 각주 등의 보조 표기로 병기되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광주광역시]] 지역의 지명 변화를 연구한 바에 따르면 1898년에는 고유어 지명의 비율이 17.5%였다가 대한제국 시기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친 이후인 1908년에는 8.7%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토지조사사업을 거친 이후인 1917년에는 6.2%만이 남았다.[[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601020956251|#]] [[미군정]] 시기에는 이런 음독 한자 표기를 고유어 병기조차 없이 그대로 한글과 로마 알파벳으로 그대로 옮겨적은 지도와 교과서 그리고 행정문서들이 작성돼 전국에 보급됐고 본국이었던 미국 등 해외로도 퍼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정부로 주권이 이양됐지만 대한민국 정부도 미군정 시기 정해진 표기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이렇게 오랜 시간 한자어 지명들이 쓰이게 되자 해당 지역의 고유어 지명들을 기억하고 있는 각 지역의 토박이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자어로 지명을 칭하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